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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한의학의 해부학적 전통에 대한 몰이해 |
한의학의 현대화, 과학화를 위해 한의사의 진단, 검진기기 사용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의학에는 해부학적인 인식이 없으므로 인체를 검사할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의학에는 해부학적인 인식이 없었을까?
동양에서 인체 해부에 대한 기록은 이미 2000년 전 한의학의 최고서인 <황제내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영추>의 ‘경수편’(經水篇), ‘위양편’(胃腸篇), ‘평인절곡편’(平人絶穀篇)에서는 사람의 형태적 구조가 서술되어 있고 이는 고대 동양의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인식이 어느 수준까지 발달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중국의 송대에서 최초로 사체를 해부한 기록은 있지만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지 않으며, 해부학 분야 최고의 의학자로 평가되는 청대의 왕청림에 와서야 사실적인 해부에 의해 오류가 시정되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인체 장부를 그린 ‘신형장부도’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해부학을 기반으로 한 외과 처치에 관련된 내용도 각종 의서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의서인 <향약구급방>에는 칼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배가 파열되어 장이 튀어나온 경우에는 보리 끓인 물로 깨끗이 씻어낸 후 뽕나무 껍질에서 실을 뽑아 꿰매주라고 하였으며, 지혈을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지혈시킬 수 있는 한약재를 으깨거나 가루 내어 상처 부위에 붙여 놓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허준과 같이 함경도 일대까지 선조와 광해군을 수행하여 공신이 된 이공기가 명나라 장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골절상에 뼈를 맞추고 상처를 소독한 후 약을 바르고 부목을 대어 묶어주는 치료법, 암이나 궤양, 종기 등이 생겨 환부를 칼과 비슷한 침을 사용해서 째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방법 등 다양한 외과적 처치들이 각종 한의학 서적마다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한 드라마 <마의>를 보더라도 한의학은 음양오행만으로 진단해야 하며 해부학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얼마나 한의학을 폄훼하는 억측인지 잘 알 수 있다. 더불어 현재는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중인 조선 명종 때 임언국이 지은 <치종지남>이라는 책을 보면 이미 당시에 현재의 외과수술에 맞먹는 대담한 수술을 한 기록과 치료 방법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의서에 기록되어 있는 해부학 내용이 보충 및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한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육은 1953년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으며, 1995년의 ‘시체해부 허가 사항’의 법 개정으로 한의과대학 자체적으로 교육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의학에 해부학이 존재했다는 것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증거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해부학 용어가 모두 한의학 용어에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해부학이 한의학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서양의학에서만 존재했다면 해부학 용어는 모두 다 한글로 새로 만들어지거나 영어로 사용해야 함에도 우리는 현재 해부학 용어들을 한의학 용어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한의학에는 해부학적 인식이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인체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해부학은 서양의학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발전해온 과학과 관찰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의사들은 현대 해부학을 교육받으면서 과거의 한의학을 수정·보완해 나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의사가 진단 및 검진기기를 적극 활용하여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길도 열려야 할 것이다.
김남일 경희대 한의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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