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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인천의 5·3 민주항쟁 30주년을 준비하며 / 이준한 |
지난 6월20일 부평구청의 한 회의실에서는 제28주년 인천 5·3 민주항쟁 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주안역 앞에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쓴 지 28년 만에 다시 모인 100여명의 인천 사람들은 <한겨레> 5월20일치에 실린 성유보 필자의 ‘5·3 인천사태’라는 글을 다시 읽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내용이 있다는 데 공감했다. 우리 인천에서는 더이상 1986년 5월3일 인천의 주안역 앞 시민회관 사거리에서 발생했던 역사적인 정치시위에 대하여 ‘5·3 인천사태’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집회를 준비했던 민통련의 회원 가운데 하나였던 성유보 필자는 그 글에서 ‘5·3 인천사태’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반복했고 ‘인천집회’라는 말도 네 번 사용했다. 그는 그날의 정치시위에 대하여 “재야 단체들의 ‘중구난방’은 때와 장소를 잘못 고른 커다란 실책”이었고 “인천집회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되었다”고 평가했다. 물론 대학 2학년생으로서 당시 주안역 앞에 서 있었던 나의 눈에도 그날의 시위는 통일성이 적었던 것으로 비쳤고 낯선 구호와 플래카드가 난무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과 가까운 인천으로 일찌감치 예정되었던 1986년 5월3일의 개헌대회를 앞두고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감했던 정권과 그 ‘큰 일’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준비했던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에 성유보 필자가 희망했던 질서정연한 연합집회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1985년 겨울을 지나면서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사상과 이론의 쟁투가 벌어지고 조직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거치면서 그날 시위에서 이른바 소아병적인 구호와 전술이 경쟁적으로 노출된 것은 큰 단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그날의 정치적 시위를 ‘5·3 인천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고집하는 사관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뿐 아니라 그날의 정치시위를 아직도 ‘5·3 인천사태’라고 부르기를 고집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면적으로 파악하여 역사가 마치 완벽한 정치현상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으로 보는 거 아니냐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인천의 5·3 민주항쟁은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이후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발생한 최대 규모의 정치적 시위였다. 그날 인천에서 열린 개헌대회는 1986년 2월 이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되었던 일련의 개헌대회 가운데 정치적 파급력이 가장 컸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당시 정권도 사전에 대대적으로 준비를 했고 당일 시위의 과격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여론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데 진력했다. 그날 새롭게 등장했던 각종 구호와 정치적 입장들은 적지 않게 급진적이었고 다소 생소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점차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인천의 5·3 민주항쟁은 반면교사의 사례로 남아 1987년 6월 항쟁이 철저히 시민과 함께하도록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인천의 민주화운동 세력도 1987년 6월에는 그 전해의 실착을 극복하려고 노력을 경주했다.
이제 인천 5·3 민주항쟁의 3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인천에서는 그날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3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아마 인천의 5·3 민주항쟁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위상을 정립하여 널리 알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1986년 5월3일의 현장에는 ‘인천 5·3 민주항쟁 터’라는 표지석이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도 이 표지석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유유히 지켜볼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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