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23 18:24
수정 : 2014.07.2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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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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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산 지역 주민이다. 이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동네에 어느 날 화상경마장이 들어섰다. 주민 몰래 4년에 걸쳐 공사를 해서 용도 변경이란 꼼수로 이전을 강행하더니, 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치자 협상에 응한다며 시간을 끌다가 불시에 임시 개장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제는 시범 운영이란 명분으로 화상경마장 운영을 기정사실화하려 들고 있다.
마사회는 경마는 건전한 스포츠이고 레저 활동이라고 강변한다. 심지어 국회 앞에서 ‘경마팬을 도박꾼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1인시위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지역 주민으로서 이런 사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경마는 도박이 아니라 스포츠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즐기려면 축구장에 가고 야구를 즐기려면 야구장에 가듯이 경마를 즐기려면 경마장에 가는 게 맞다. 마사회가 경마팬의 사례로 내세우는 영국 여왕이 경마를 관람하는 곳도 실제 경마장이지 화상경마장이 아니다.
물론 직접 경기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경기를 관람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축구를 보거나 야구를 보면서 돈을 걸고 승률을 맞히는 않는다. 지하 7층, 지상 18층 규모의 거대한 건물 실내에 빼곡히 앉아 돈을 걸고 대형 모니터로 경기를 보는 건 스포츠 애호가의 태도는 아니다.
화상경마장은 선수와 말의 뜨거운 호흡을 느끼며 고된 훈련의 결실을 응원하는 곳이 아니라 승률 높은 경주마에게 베팅을 하는 곳일 뿐이다. 법적으로도 카지노, 경륜, 복권 등과 함께 사행산업으로 분류되어 있다.
마사회는 ‘화상경마장’을 ‘경마’로 교묘하게 바꿔치기하여 그 본질을 가리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지역 주민이 문제 삼는 것은 경마가 아니라 화상경마장이다. 우리는 도박장을 이웃하고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용산 화상경마장이 들어선 곳은 주거 밀집 지역이고, 인근에 가장 가까운 학교인 성심여중·고는 화상경마장으로부터 235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화상경마장 앞길로 2개 노선이, 그 아래쪽 원효로 성심여중·고 앞길로는 5개 노선의 시내버스가 다니는데, 화상경마장에서 쏟아져 나온 ‘고객’들은 주로 원효로 쪽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마을의 등불’이어야 할 학교가 유해 환경에 노출되고, 여학생들의 통학로가 직접 위협받게 된 것이다.
화상경마장은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전자상가로 둘러싸여 있고, 바로 옆에는 롯데시네마가 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용산역이 있으며, 용산역을 중심으로 백화점과 대형마트, 농협 매장 등 주민들의 문화공간과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대중교통에 의한 접근성도 좋다. 이런 지역 여건이야말로 마사회가 화상경마장을 이 지역으로 끌어들인 이유일 것이다. 전에는 살기 좋던 환경이 오히려 지역 주민에게 악몽이 되었다.
화상경마장으로 몰려들 도박꾼을 피해 이제 지역 주민들은 주말 내내 아이들의 외출을 금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주말 극장 나들이나 늦은 오후의 장보기 같은 일상적 활동이 위협당하게 되었다. 도박장이 몰고 온 평지풍파는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고 교육권과 주거권을 훼손하고 있다.
한때는 화투판의 타짜 영화가 화제가 되더니 요새는 내기바둑 영화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단다. 화투든 바둑이든 일단 도박이 되면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주게 된다. 다음에는 화상경마도 다뤄봄 직하지 않은가.
이미혜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3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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