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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노병은 생각한다 / 김영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6·25 때 북진하는 모습을 그린 노래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전투에서 11명의 분대원 중 9명을 잃은 분대장이다. 낙동강 전선 최후 방어선인 경주 북방 신방리 285고지 공격전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9·28 서울 수복. 친구들은 그날을 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우리는 6·25가 터지자 자원 입대한 학생들이었다.
노래에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도 나오는데, 당시 우리는 3개월 동안 야전에서 주먹밥과 화랑담배로 살았다. 입대하면서 전쟁터로 나갔으니 훈련도 기합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일이 없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용기를 주며 형제같이 살았다.
최근 군에서 일어난 윤 일병 사건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저 화부터 치밀어올라 견딜 수가 없다. 지난날 그토록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웠던 군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전쟁을 겪어본’(battle tested)이라는 말이 있지만 전쟁을 해보지 않아 그런가. 하기야 지금 군에는 6·25를 체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지하철 1호선 전철을 타고 다니며 전방에서 나오는 군인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거의가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다. 얼마나 군대생활이 고되면 그럴까 하면서도 한편 기분이 언짢다. 그들은 군인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국가의 간성이다. 나는 지금 구십 노인이지만, 6·25 때 싸운 분대장이라는 긍지로 전철에서 언제나 서 있다. 지난날 전투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 쓰러진 전우들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장도 거짓말도 아니다. 나만 사는 것 같아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일제 때 소위 ‘징병 1기’로 일본 군대에 끌려갔는데, 하루는 빗속을 행군하며 우비의 두건을 썼더니 옆에서 누군가 쓰면 안 된다고 했다. 귀가 가려져 적이 와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은 기합보다 군기가 엄했는데 군국주의 시대여서 그랬을까.
군대는 물론 일반 사회와 다르다. 언제나 전쟁을 예상하고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군은 무조건 강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정신이 아닐까. 그것을 나는 전우애와 군기에서 온다고 본다. 아무리 훈련의 강도가 높아도 이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적과 붙었을 때 싸움보다 먼저 도망칠 생각부터 하게 된다.
군복무가 국민으로서 으뜸가는 의무로 알면서도 사람들은 군에 가길 꺼린다. 기합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군의 기합은 약자를 강자로 만들려는 사람의 방법인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서 문제다. 오늘날 기합은 이유 없는 폭력으로 돼 있다. 이것을 고치는 방법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집에서 희미하고 약했던 아들이 군대에서 당당한 젊은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백마고지에 있는 281고지 전투를 잊지 못한다. 1951년 12월18일 야간전투에서 몰려온 적군을 300명이나 살해하고 아군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던 그 전투다. 보병 9사단 28연대 2대대가 그 주역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들이야말로 계급 없는 인간애로 뭉친 진정한 전우였다고 믿는다.
나는 해마다 옛날 싸움터를 찾는다. 1950년 9월14일 학도병 60명이 공격한 형제산 285고지가 그곳인데, 전날 비로 불은 강을 건너, 공격대기선을 넘자 적의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앞에 섰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현지 임관 소대장이 쓰러지고, 내 뒤를 따르던 분대원 10명 중 9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우리는 내무반도 훈련도 모르는 신병들로 아침마다 강가에서 세수하러 가며 ‘무명지 깨물고서 붉은 피를 흘리며’라는 군가를 즐겨 불렀던 친구들이다.
만일 윤 일병이 전투하다 죽었다면 우리의 가슴은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사내답게 군인답게 싸우고 갔으니까. 오늘의 군대는 전쟁을 모르고 너무 편안해 그런가라고 가끔 생각하는 것은 나의 부질없는 편견일까.
김영도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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