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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3 20:37 수정 : 2014.09.03 20:37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릴 적 오빠와 나이 차가 많이 나던 나는 오빠와 오빠 친구들이 놀아주기만 하면 그저 행복했었다. 어느 날 늦은 오후, 오빠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사실 오빠 친구들이 나를 같이 숨바꼭질을 하는 친구로 인정하지 않음에도 한 오빠의 “자~ 시작한다”는 소리와 함께 혼자 집 뒤에 숨었다. 그 오빠는 친구들을 찾아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난 어린 마음에 혼자 신이 나서 점점 몸을 웅크려 숨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고 오빠와 오빠 친구들이 전부 집에 돌아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와 오빠 친구들은 내가 숨바꼭질을 같이 하고 있는 줄 몰랐으니까. 그 순간 어머니의 “얘야, 어디 있니?”… 그 소리만큼 반가운 게 있을까?

세상을 많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이 나라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학교도 멋지게 짓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교육과정도 만들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양육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 모든 과정과 내용에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어른들은 일정한 모습의 일정한 틀 안에 있는 아이들이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 편함이 ‘옳음’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 틀을 벗어나는 아이들은 ‘문제행동’ 아이이거나 ‘도움이 필요한 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투자한 시간만큼 성적이 오르는데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면 ‘불편해진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숙제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데 내 아이는 숙제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한다고 인식하면 ‘불편해진다’.

내 아버지는 무척 엄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는 당신의 딸이 아버지가 정하신 틀 안에서 잘 자랐다고 아신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 틀에 별로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을. 혹시 지금 우리들의 아이들이 우리가 정한 이 틀 안에, 이 내용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아니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환경과 틀, 내용에 사실은 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손을 들어 물었다. “지금 우리가 아이들 이야기하는 거 맞나요?” 한 사람이 약간 성을 내며 말했다. “아니 지금 아이들 이야기하고 있지 무슨 이야기세요?” 아니다. 나는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하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어떻게 하면 어른들이 보기 편안한 틀을 좀더 정확히 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나 교사에게 정확히 전달할까, 그리고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언제 어떻게 평가할까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일본 드라마 중에 <에디슨의 어머니>라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 아이는 항상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묻는다. “도시테”(왜요?) 좀더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의 소리, 아이들의 몸짓에 집중해보자. 세상은 발전한다. 그러니 이미 어른이 된 나보다 지금 자라나는 이 아이들이 더 위대하고 훌륭하다. 지금이라도 외쳐 물어보자. “얘들아 어디 있니? 거기 있는 거 맞니? 아니면 다른 데 있는데 우리가 못 찾는 거니?”

민성혜 고려사이버대 아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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