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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국회의 무기명 투표부터 없애자 / 이덕하 |
이른바 철도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송광호 새누리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국회의원 223명 가운데 73명만 찬성해서 부결됐다. 무기명 투표였다. 국회법(제112조)을 보면,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 “기타 인사에 관한 안건”, “국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선거”,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건의안” 등은 특수한 예외가 아니면 무기명 투표로 결정한다.
선거의 4대 원칙은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다. 국민은 비밀선거를 통해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소신껏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개인 자격으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를 대표하여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극히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국회에서 모든 사안은 기명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이라고 해서 법률안이 아닌가? 유권자는 해당 법률안에 대해 자신이 뽑아준 국회의원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당연히 알아야 한다. 정치인의 이념적, 정치적, 정책적 신념을 알아야 투표를 제대로 할 수 있다.
해임건의안이나 체포동의안은 정치적 신념과 무관한가? 아니다. 이번 송광호 의원 체포동의안에 반대 투표를 한 국회의원들에게도 나름대로 정치적 신념이 있을 것이다. 검찰이 여당 탄압을 위해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고, 중대 범죄의 혐의라도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또 같은 당 동료 의원을 감싸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면 정치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을 유권자로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외압에 시달리지 않고 소신껏 투표할 수 있도록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무기명 투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법률안에 대한 투표는 통상적으로 기명 투표로 하나? 아예 국회의 모든 투표를 무기명 투표로 하면 국회의원들이 소신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무기명 투표로 하면 권력자의 눈치를 덜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눈치도 덜 보게 된다. 국회의원에 대한 유권자의 통제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여야 의원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치열하게 싸우다가 휴식 시간에는 아주 친해진다고 한다. 체포동의안을 기명 투표로 하면 이런 친목에는 방해가 될 것 같다. 국회의원 간 친목 도모는 그들끼리 똘똘 뭉쳐서 특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유권자에게는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방탄국회를 안 하겠다고,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국회의원들끼리 요란하게 선언한다고 해도 그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선언으로 국회가 바뀌길 기대하느니 조폭의 어깨에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새겨주고 나쁜 짓 안 하길 기대하는 편이 낫다.
모두가 모여 뇌물을 받지 말자고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뇌물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뇌물죄의 형량을 대폭 늘리고 거액 뇌물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면 뇌물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마음을 바꿔 먹으라고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반면 제도가 바뀌면 행동이 금방 바뀌기도 한다. 만약 기명 투표였다면 이번 체포동의안이 부결됐을까?
이덕하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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