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9.24 18:37
수정 : 2014.09.24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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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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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 ㄱ은 살인 현장에서 피해자 가족인 ㄴ과 대치하던 중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검찰은 ㄷ을 살인교사범으로 기소하였지만, 현장에 있던 ㄱ은 ㄷ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기소하지 않았다. 1심 재판에서 ㄱ은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ㄷ이 살인을 교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 ㄱ은 피해자 가족인 ㄴ을 감금죄로 고소했고, 검찰은 ㄴ을 감금죄로 기소했다.
이 사건의 경우, 과연 검찰은 실체적 진실 발견과 유죄 입증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사범은 기소하고 정범(살인범)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상식에도 어긋난다. 지난 대선 때 인터넷에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올렸던 국가정보원 직원 김하영씨가 기소되지 않고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모습은 위 사례와 유사하다.
9월11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불법정치관여 및 불법선거운동 사건’의 제1심 재판부 이범균 판사는 원 전 원장에게 국가정보원법상 정치관여금지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 위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야당과 진보언론들은 해당 판사를 비판했다. 누리꾼들도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것이냐”고 비난했다. 반면 보수언론들은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했다”며 오히려 검찰을 꾸짖고 나섰다.
‘원세훈 재판’ 판결문의 전문을 읽어 봤다. 필자는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이범균 판사가 비판의 십자포화를 받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해당 재판부는 일부 언론보도와 달리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활동 등이 불법선거운동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 없다. 해당 재판에서 해당 직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아 그들의 유죄 판단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원 전 원장이 직접 댓글을 달지 않은 이상 그의 유죄 여부 판단의 주 대상은 그의 지시 행위일 수밖에 없다. 해당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 등을 봤을 때, 국정원법에서 금지하는 정치관여 행위를 지속적으로 했기에 원세훈의 유죄가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선거 관련된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원세훈의 지시·발언 등에 선거개입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선 후보가 특정되기 전이다. ‘선거법상의 불법선거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선거운동 행위 당시 후보가 특정돼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다. 따라서 대선 후보가 특정되기 전에 나온 원세훈의 지시는 국정원법상 위반에는 해당하지만, 선거법상의 불법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일면 수긍이 간다. 선거법의 불법선거운동 조항을 후보가 특정되기 전 행위로까지 확대하면, 이후 선거운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고 검찰의 무리한 기소권 남용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당 재판부가 비판받아야 하는 지점은 재판부가 “지속적으로 국정원장이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훼손하고 불법적 정치관여를 하여 그 죄책이 중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를 선고한 대목이다.
사법부는 트위터 글 ‘한 건’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하고 있다. 검찰이 증거로 확보한 국정원 직원들 트위터 글과 댓글만 해도 수십만 건이다. 설령 국정원 직원들의 ‘개인적 일탈’이라 할지라도 그 죄가 가볍지가 않다. 만약 기소됐다면 이들은 국정원법의 정치관여 금지, 국가공무원법의 정치적 중립 의무, 선거법상 불법선거운동 및 허위사실 유포죄 위반 등으로 형사처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국정원 직원들을 기소하지 않은 검찰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 결과 원 전 원장 등의 불법선거운동 유죄 입증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무죄에 대해서는 사법부보다 오히려 검찰이 더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다.
검찰도 지난 17일 항소했다. 이제라도 검찰이 정말로 유죄 입증 의지가 있다면, 기소도 되지 않은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글 등에 매달리기보다 원세훈의 불법선거개입 지시의 증거를 확보하고, 그가 직원들의 불법선거운동 활동 상황을 보고받았는지 여부 등의 입증에 주력해야 한다. 더하여 해당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도 기소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적 일탈로 한 행위인지, 윗선의 지시에 따른 행위였는지 밝혀질 수 있다. 원세훈에 대한 선거법 무죄 판결에 대해 사법부를 비판하는 사이 국정원의 책임과 검찰의 부실한 기소 등의 책임이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아닌지 이제라도 짚어볼 일이다.
남경국 독일 쾰른대 법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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