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면] 법의 흠 / 이창근 |
‘부르르’ 전화기가 떨렸다. 기자 전화였다. 대학 특강 수업을 하던 터라 받을 수 없었다. 전화기는 계속 울렸고 문자 또한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언론 담당이라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기쁜 일보다 나쁜 일이 물론 더 많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재판 결과를 확인하는 전화였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보전가처분’ 재판에서 졌다. 10월13일이었다. 덤덤했지만 발걸음은 바빠졌다. 이곳저곳에 확인 전화를 넣고 부랴부랴 평택 노조 사무실로 향했다. 어떤 근거로 평택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을까.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판결문을 전화기 화면에 가득 담아 꼼꼼하게 읽었다.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이 완전히 뒤집힌 결과였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6년간의 질긴 싸움에 또 한번 된서리가 내린 것이다. 계절을 앞질러 온 ‘법 서리’가 해고자들에게 가을 허기를 안기고 말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가 또 한번 난항에 빠졌다. 법원 판결은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난 2월7일 6년을 끌어오던 해고 문제가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서울고법이 정리해고가 무효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2년이 넘는 심리 끝에 내린 권위 있는 재판에서 회사 쪽이 패소했다. 정리해고에서 중요한 인원 삭감의 필요성과 규모에 있어 합리성이 입증되지 않아 경영상의 필요성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경영상의 긴박성이 일부 인정되더라도 해고회피 노력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그런데 이번 가처분 재판에서 법원은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했다. 판단의 대상이어야 할 삼정케이피엠지(KPMG) 보고서와 금융감독원 그리고 검찰의 판단 등을 오히려 판단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증거 내용에 대한 실질적인 판단보다 증거의 개수를 보고 판단했다. 해고자들의 바람을 차갑게 짓밟은 정치 판결로 보는 이유다.
이번 판결의 또 다른 특징은 해고무효확인 소송의 기본인 입증 책임을 회사가 아닌 해고자에게 지웠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처분 재판의 특수성이 있다지만 해고 당한 이들이 해고가 무효임을 입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정리해고가 정당했다는 회사 쪽이 그 근거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동성 위기 부분도 별다른 근거 없이 국내외 경제상황만 따졌다. 특히 쌍용차 정리해고 핵심 쟁점인 유형자산손상차손 문제는 이번 판결의 압권이다. 유형자산손상차손 과다계상 문제는 서울고법 재판이 2년 가까이 길어지면서까지 다퉜던 중요한 쟁점이었다. 서울고법은 회사와 회계법인의 주장은 물론 감정 결과까지 믿을 수 없다며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면서 판결했다. 이렇듯 심혈을 기울인 서울고법의 판결을 평택지원은 배제했다. 오히려 회계법인 보고서, 검찰의 무혐의 처분 등을 들어 유형자산손상차손이 과다계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가처분 재판은 서면 중심의 재판이었다. 숫자엔 표정이 없고 하얀 백지 위 검은 글씨엔 지난 시간의 아픔이 묻어 있지 않았다. 흠투성이 판결 앞에 해고자들이 있다. 그러나 쌍용차 해고자들의 6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가처분 재판에서 진 것뿐이다. 한편으론 쌍용차 문제를 법에만 맡겨둬선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것이 확인된 재판이기도 하다. 쌍용차 문제는 한국 사회 아픈 단면이다. 함께 머리 맞대고 풀 수밖에 없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 법의 흠을 사회가 메워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이창근 쌍용차 해고노동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