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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2 18:29 수정 : 2014.11.12 18:29

어릴 적, ‘죽음’이란 단어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건 활자화된 단어로 또박또박 쓰인 두 단어일 뿐, 나에겐 아주 먼 미래의 꿈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살아낸다는 것은 ‘죽음’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겪어내고 그 다음 차례에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죽음’과 ‘삶’의 무경계성에 조금씩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 두 단어가 활자에서 내게 걸어오기 시작한 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의 죽음’은 ‘남의 일’로 치부된다.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죽음의 기사들 앞에서 그것은 여전히 활자화된 단어일 뿐이다. 심지어 누군가가 스스로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끔찍한 순간에도, 옆방 누군가의 할머니가 죽은 채 방치되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순간 앞에서도. 그것은 나의 할머니가 아닌 이상 온전히 타자일 뿐이다. 온 사회가 깊숙이 ‘나의 일’로 여겼던 세월호 사고 마저, 시간의 힘 앞에서 ‘남의 일’로 부패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공감’의 진공상태에 놓여 있다.

‘무공감’의 부정적 힘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주범이던 아이히만. 그는 수많은 이들의 숨통을 잔인하게 끊어낸 뒤에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은 나와 관계성을 맺지 않은 개체였을 뿐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희생 앞에서도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 근저에는 과거에 대한 ‘무공감’이 존재한다. 서슬 퍼런 과거. 구두닦이, 철가방, 교복 입은 학생까지, 그 수많은 평범한 개인들을 피로 물들여 놓았던 광주의 긴 새벽까지, 그곳에서 죽음이란 단어의 숭고함은 또박또박 쓰인 활자처럼 공감의 생명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감’을 꿈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서, 그가 잡아준 따뜻한 손길에서,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원했지만 미처 잡지 못했던 공감을 꿈꿨다. 양극화의 늪에서, 누군가는 빈곤하고 누군가는 빈곤하지 않은 차별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내 삶’이 숨에 차 공감하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손은 우리 내부가 아닌 다른 나라의 교황 앞에서 그렇게 우리를 기억나게, 다시 꿈꾸게 했다. 우리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1위이며, 노인 자살률의 비율은 오이시디 평균의 4배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엄마, 아빠를 외치던 아이들은 끝내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죽음’을 활자화된 남의 일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희망은 피어나지 못한다. 그 죽음은 나의 할머니, 아버지의 일이고 내게 닥쳐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시 함께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희망’은 다시 꽃피어야만 한다.

문정빈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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