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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7 18:45 수정 : 2014.11.17 18:45

8년 전 2006년 3월17일이었다. 구로공단 후미진 건물에서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던 때였다. 혼자 편집을 하다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한 사내의 이야기가 눈길을 잡았다. 본사 로비에서 농성을 하던 코오롱 해고자들이 회장 면담을 요구하며 17층 회장실로 올라가려던 과정에서 한 해고자가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 했다는 끔찍한 기사였다. 글로만 보면 충격이 덜할 텐데 칼을 든 손이 용역들에게 붙잡혀 있는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부디 그 사내가 안녕하기를 바랐는데 다시 열흘 뒤 그 사내가 새벽 5시 이웅열 코오롱 회장집을 넘어 들어갔다가 끝내 손목을 그었다는 비릿한 이야기를 전해들어야 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라는 유서도 공개되었다. 그는 꼬박 6개월의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내가 출판일을 접고 거리로 나오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가 최일배였다. 1992년 스물다섯 나이에 코오롱에 입사한 뒤 8년 동안 노조 사무실 근처에도 안 가보고, 노조는 우락부락하고 거센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던 ‘착한 노동자’.

2005년 2월17일 코오롱 사측은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나섰다. 418명이 희망퇴직으로 나갔고, 임금 15% 삭감과 추가 희망퇴직자를 받는다는 노사 합의가 있었지만 회사는 평소 눈엣가시이던 78명을 정리해고했다. 희망퇴직자 431명 가운데 410명은 비정규직으로 같은 자리에서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64일간의 파업, 삭발, 단식투쟁, 고압 송전탑 농성, 본사 점거 농성, 회장집 진격, 동맥 절단, 첫번째 구속, 3보1배, 크레인 농성, 한강 다리 기습시위, 동아일보사 점거 농성. ‘근조 코오롱’ 관을 차에 싣고 상복을 입고 서울과 과천 거리를 누벼보기도 했다. 2010년엔 구미공장 맞은편에 있던 케이이씨(KEC) 정리해고가 남일 같지 않아 돕다 두번째 구속이 되어 또 6개월을 살고 나와야 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정리해고 문제가 사회화되고, 대한문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사회적 분향소가 서던 때 다시 용기를 내어 2012년 5월21일 경기 과천 코오롱 본사 앞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도 벌써 2년 반이 되어간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집에 가지 않을 작정으로 사계절 옷 보따리를 싸들고 상경했다.

작년부터는 꽃분홍색 몸벽보를 입고 전국의 산으로 등산을 다니며 코오롱스포츠 불매운동도 시작했다. 삶은 계란 4만개를 나눠주며 사회적 응징을 호소했다. 코오롱 사측은 전국 주요 102개 산에서 불매운동을 막아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내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가처분신청대로라면 법원은 코오롱 불매운동을 막기 위해 집행관을 전국 102개 유명산, 1000개가 넘는 등산로에 보내 가처분 내용을 공시해야 한다.

그런 그가 지난 11월5일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고 한다. ‘다시’ 목숨을 건다고 한다. 언제까지 그는 ‘다시’, ‘다시’ 꿈과 희망이라는, 정의라는 너무나도 희미하고 가녀린 소망을 부여잡아야 할까. 그의 아내는 오늘도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씩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과 같은 나이대의 사랑스런 딸이 있는 그는 ‘다시’ 세월호 참사가 ‘또’ 남일 같지 않아 진상규명 투쟁을 쫓아다니다 다시 경찰 조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만, 그가 더 깊은 절망의 바닷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우리가 그의 손을 붙잡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그만 우리 모두가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닌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외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코오롱스포츠 불매라는 소극적 항의에라도 함께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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