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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탁한 세상, 불법의 향기가 그립다 / 하훈 |
수불 스님. 자본의 거센 탁류에 아이들이 쓸려간 지 벌써 세 번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캄캄하고 황망한 나날들. 넋 나간 부모들이 잠시 흥분해 폭력사건에 휘말리자, 기다렸다는 듯 이리 떼처럼 달려들어 그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진실규명은 세월호처럼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차마 눈감지 못한 아이들이 발길을 떼지 않고 아직 주변을 서성이지 않을까, 두렵고 또 두렵기만 합니다.
더한 비극은 4·16 참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폭력 뒤안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음소리조차 한 번 내지 못하고 쓰려져 가고 있나요. 얼마 전엔 12살 어린 딸을 데리고 부부가 모진 목숨을 버렸습니다. ‘엄마와 함께해서 하나도 슬프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엄마 곁에 누운 소녀에게 이 땅 이승의 삶은 죽음보다 더 끔찍했나 봅니다.
스님들께서 큰 불사에 기부하시는 모습을 언론에서 종종 뵈었습니다. 기부는 선의에서 우러나오는 일이지만 성직자가 나서서 하면 그 모양새가 달라 보입니다. 내세울 게 없으니 돈을 내세우는 것 아닌지, 어쩐지 가난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부정한 돈이야 아니겠지만 성직자가 그렇게 많은 돈이 있어도 되는 것인지, 또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모을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옛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칼과 황금으로 불교를 크게 일으킨 역사가 있지만, 그는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돈 자랑’ 행태를 당연히 여기거나 찬탄하는 이 땅 불자들의 어리석음도 반성해야겠습니다. 탁한 세상에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드는 불법의 향기가 그립기만 합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베트남의 틱꽝득 스님과 독일의 퓌러 목사. 분단국이던 이들 두 나라의 성직자들은 분열과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혁파했습니다. 허리가 잘린 국토를 자신의 몸처럼 아파했습니다. 현실과 타협 않는 종교인들의 정신은 통일국가로 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마당에 선방의 ‘이 뭐꼬’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불교의 중도란 현실과 이상 사이에 경계를 짓지 않는 치열함일 것입니다.
조계종 전국 사찰 곳곳에서 템플스테이가 유행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식 힐링’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펼치신 ‘선의 대중화’도 크게 기여를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진정 자기 마음 하나 맑고 고요하게 닦으면 세상도 맑아지는 것일까요? 총칼보다 무서운 자본의 폭력 앞에서 죽어나가는 민초들을 뒤로하고 그들만의 맑고 고요한 향을 피어올림이 과연 마땅한 일인지 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사찰 접수를 위해 불자들끼리 충돌한 성주사 사태 등 여기저기 스님과 관련된 잡음들이 들려왔지만 참모들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탓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저희와 차원이 다른 정신세계와 권위로 중생들을 이끌어 주시시라 믿습니다. 공직자가 엄격한 청문회 절차를 밟듯이 성직자는 더 엄정한 도덕적 잣대를 통과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깨어 있지 않는 성직자는 중생들의 영혼을 잠식하여 나라의 근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다른 나라 사례에서 분명히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이면을 통찰하시어 진리를 일깨워 주십시오. 지금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는 자본의 폭력 앞에 눈을 감지 말아 주십시오. 자본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주눅이 들고 왠지 슬슬 눈치를 보는 대한민국이지만, 스님들이야말로 그 굴레를 벗어나 잘못은 잘못이라고 일갈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시절 인연을 기다리기엔 지금 중생들의 고통이 너무 절절합니다. 제가 어리석어 구업(口業)을 짓고 말았습니다.
하훈 평화기획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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