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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광주트라우마센터 위탁 추진 안 된다 / 한홍구 |
광주에 가면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있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나 사고가 나면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심리치료 얘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지만,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광주민중항쟁이 있고 32년이 지난 2012년에야 뒤늦게 문을 열었다. 센터가 문을 열 때까지 광주민중항쟁 관련자 중 4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률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살률에 견줘도 500배나 높은 비율이다.
우리가 광주에, 광주민주화운동에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민주화운동 출신들이 10년 동안 정권을 잡은 나라에서 광주항쟁 관련자들과 고문 피해자들이 이렇게 소리 없이 죽어가는 동안,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센터나 고문 피해자들을 위한 전문 치료기관 하나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200여개나 되는데도 말이다. 중앙정부도 광주시도 책임을 떠맡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광주 밖에서도 힘을 보태달라고 트라우마센터 연구용역이 서울토박이인 나에게까지 왔을까? 급하게 평화박물관에 연구팀을 꾸려 보고서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건복지부의 정신보건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한시적’ 기구라는 형태로나마 광주트라우마센터가 문을 열게 되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멀리서 광주트라우마센터의 활동을 지켜보던 차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부의 시범사업 종료 1년을 앞두고, 광주시가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위탁 운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광주시가 위탁 운영의 자격조건으로 ‘정신보건사업을 전문적으로 충실히 수행할 능력’을 내걸었지만, 5·18 같은 국가폭력에 대해 전문성 있는 광주 소재 학교법인 또는 비영리법인이 있을까? 트라우마센터 건립을 위한 기초연구용역의 책임자로서,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진 외부기관은 없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인 병원 의료체계로는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 치료가 어려워, 독립적인 치유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큰 흐름이다. 물론 국립정신병원이나 보훈병원,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정신보건센터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곳들의 의료진은 지금도 힘겹게 삶을 이어나가는 분들의 호소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고, 할 수도 없다.
여러 연구 끝에 우리 용역연구진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우리가 세워야 할 트라우마센터는 국가폭력에 맞서 싸워온 생존자들을 무슨 정신질환자로 보고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그분들의 자기치유력을 믿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분들이 내버려진 외톨이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단단한 지지 체계를 갖춘 곳이다. 이 치유체계는 정신의학적 처방을 당연히 포함해야지만 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어쩌다 광주트라우마센터에 들르게 되면 참 고마우면서도 많이 미안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이름으로는 외부로 공문 하나 보낼 수 없고, 직급과 급여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단기계약직들이지만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다. 국가폭력 생존자들로부터 엄청난 사랑과 지지를 받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는 곳,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내 손을 잡아주는 곳, 화만 내고 시비만 건다며 어디가도 별로 환영받지 못하던 생존자들이 마음껏 놀고 수다 떨 수 있는 곳, 그곳은 생존자들이 약이나 몇 알 받아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상처입은 생존자들 내면에 억눌려 있던 치유의 힘이 서서히 샘솟아 나도록 하는 곳이었다.
잘해왔지 않은가? 그래서 새로운 시장이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아시아 트라우마 치유 허브’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원확대를 공약했을 터다. 그런데 광주시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트라우마센터의 건립과 운영계획을 세우는 대신, 5·18이라는 민족의 자랑이자 지역의 큰 아픔을 온전히 기억하고 치유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으로 승화시키는 대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한 위탁사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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