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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0 18:58 수정 : 2014.12.10 18:58

여기 사람이 있다. 설령 그의 곁에서 연좌는 하지 못할지언정 스마트폰에서 잠시 눈을 떼고 그를 응시하자. 그를 응시하는 것은 나를 응시하는 것이며 우리 자식의 미래를 응시하는 것이다. 이 땅의 높은 권세가들, 재벌기업 사주들, 대법관들에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막 대해도 되는 아랫것들이다. 대통령 ‘각하’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민이 아닌 투명인간이듯이, 이른바 ‘라면 상무’나 ‘땅콩 부사장’에게 노동자들은 다만 먹여 살리는 9999명의 잉여들이다. 필경 그의 사람다움 때문일 것이다. 아랫것임을 부정하고 10년째 싸우고 있는 것은.

그의 이름은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위원장이다. 코오롱 회사 쪽이 노사합의를 깨고 정리해고를 단행한 2005년 2월부터 몇번째인지 알 수 없는 단식의 37일째인 오늘까지 그 질기고 지난한 과정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는 대충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을 직접 겪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철탑 고공농성, 크레인 고공농성, 천막농성, 삼보일배, 일인시위, 노숙, 삭발, 집회, 선전전… 이 과정에서 구속되는 일도 벌금형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까지 우리는 알고 있다. 또 그의 반대편에서 누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용역깡패, 부당노동행위, 공권력 동원, 어용노조, 회유….

마지막으로 기댄 법도 강자 편이었다. 법은 “힘센 자의 권리”일 뿐이며 “피로 물든 역사로 인류에게 대물림된 압제에 언제나 봉헌해왔다”고 말한 크로폿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가령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해 고법 판결을 뒤집어 합법이라고 판결한 대법원에 동의할 노동자는 누구일까. 그러나 이 땅의 의식에 소비자는 많지만 노동자는 별로 없다. ‘혹시나’가 대법원에서 ‘역시나’로 바뀌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본 쪽으로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그에 맞선 노동자의 싸움은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다는 점을… 그렇게 우린 불의의 사회 현실을 충분히 알면서 거기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하여 ‘미생’을 벗어나려면 굴종을 강요하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모습이란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나와 같은 약자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여 나를 불편하게 하냐고.

최일배 노동자는 물불 가릴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싸움꾼일까? 1992년에 25살 나이로 코오롱에 입사한 그는 8년 동안 노조 사무실 근처에도 안 가본, 노동조합을 무서워했고 노조 간부들은 우락부락하고 거센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은가. 앞장설 줄 모르고 주변에 머물러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고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코오롱 회장 집에 면담을 위해 들어가려다 잡혀가게 되었을 때 자해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과거를 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힘들게 다가와도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미력한 투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조그만 밀알이 된다면 그 투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몰라도 투쟁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11월5일 단식을 시작하기 며칠 전에 잠깐 본, 말없이 미소를 지었던 그의 선한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현장의 싸움에 함께하는 것을 ‘연대’라고 부르는 대신 ‘나의 싸움’이라고 말할 줄 아는 그는 나에게 이 시대에 점점 희귀종이 되어가는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당부하고 싶다. 이번 토요일 오후 3시에 과천 코오롱 본사 앞으로 39일째 단식중일 그의 손을 잡으러 가자고. 코오롱이 노동자들에게 문을 열고 정리해고를 분쇄하는 희망을 함께 나누려는 “12월13일, 10년의 싸움, 3650인의 화답”에 함께하자고.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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