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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8 18:37 수정 : 2014.12.18 18:37

1990년대 말 내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을 때 이곳 통일운동은 이른바 ‘친북’ 일색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었으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남쪽 정치 지형에서 ‘통일’ 논의는 입에 올리는 순간 면책 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이건 뭐건 치도곤을 당하던 시대가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1987년 이후 통일 논의를 주도한 민족해방(NL) 계열의 주장이나 운동 방식은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어서, 남쪽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교민들이 통일을 입에 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설사 그것이 ‘대남전략’의 하나였을지 몰라도 통일운동 인사들에게 많은 공을 들여왔기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겪으면서 교민사회도 많이 바뀌는데 1970~8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햇볕정책과 같은 화해 무드로 ‘남쪽’ 출신들도 비로소 통일을 이야기할 여건이 조성되었다.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도 생겨 원로 통일운동 인사들과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0년대 이후 통일운동 인사들이 선배들과 머리를 맞댄다는 것은 격에 안 맞기도 했지만, 새로운 통일운동 세대의 정서가 대한민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가산점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조국은 하나’인데 통일운동에 친북이 어디 있고 친남이 어디 있냐고 따져 들었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를 향해 ‘잘못된 반공교육의 영향’이라고 조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래도 서로 민감한 부분은 안 건드리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가면서 연대해 오고 있는 것이 엘에이 통일운동의 현재 장면이다.

신은미씨는 이런 배경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었다. 일부에서는 남편의 영향을 이야기하지만 그 부부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미국 이민 뒤 사업에 성공해 재력도 갖추고 여행을 취미로 삼다가 우연히 북한에 가보게 되었고, 북한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으로 알고 있던 기존의 편견을 벗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일 뿐이다. 신은미씨의 방북기는 이곳 통일운동이 북한에 대한 편견을 벗기려고 애써온 노력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통일운동 인사들에게는 반가우면서도 마치 자기의 장터를 빼앗긴 듯한 묘한 감정을 갖게 하기도 했다.

신씨는 대한민국을 자기의 나라로 생각하는, 즉 친북 일색이던 통일운동의 기울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친남’ 통일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친남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이 새누리당 정권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민국 정부는 ‘자기 편’인 신은미를 버렸다. 오죽하면 그의 입에서 짝사랑하다가 배신당한 느낌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신은미를 버림으로써 대한민국은 해외에서 기울어진 통일운동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던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을 천애고아로 만들어버렸다.

김기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평화의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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