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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헌재의 폭력’과 흑백논리가 통하는 사회 / 문상배 |
통합진보당은 끝내 헌법의 이름으로 2014년 12월19일 해산당했다. 국가 기관의 이런 결정은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은 물론 정치적 견해가 다른 국민들을 향한 선전포고라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 소장은 선고를 시작하며 “부디 이 결정이 우리 사회의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을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을 듯하다. 헌재의 결정에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조차도 깊은 한숨과 시름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번 결정이 다름을 탄압하고, 비정규직·농민·노동자를 대변하는 진보 세력의 입을 막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은 더 이상 진보좌파의 담론을 늘어놓기 어렵게 하는 또 다른 긴급조치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당해산제도는 이승만 정권이 행정처분으로 진보당을 해산한 전례를 반성하며 정권이 함부로 정당을 해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이 제도가 칼이 되어 헌법의 이름으로 다시 진보당을 해산하는 정치적 도구로 쓰였다.
헌재는 자의적 결정으로 소수당에 대한 집권세력의 폭력행위에 동조했다. 헌재가 오히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집권세력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최소한의 요건이다. 정당해산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국가권력이 해산의 주체가 된다는 게 온당한 일인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정당 강령으로 둘 수 없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산당이나 극우정당까지 허용하는 유럽 선진국들이 보면 한국을 얼마나 못난 국가라고 하겠는가. 70년 이어져온 낡은 분단체제는 끊임없이 분단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민주주의의 열망을 주저앉히기 위해 분단을 빌미로 한 색깔공세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집권세력은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일자 종북몰이를 시작했고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비선 권력개입 의혹 위기를 탈출하고자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졸속으로 서둘러 하지 않았나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했던 정권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진보당 조봉암을 사형시켰던 이승만은 1년이 못 되어 4·19 혁명으로 물러나야 했고, 신민당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던 박정희 유신정권은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모질게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 역시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고 말았다.
세상은 미국조차 쿠바에 손을 내밀 정도로 이념의 벽을 허물고 있다. 시대착오적 종북몰이를 멈추어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낡은 분단체제에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주파가 당을 장악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다고 한다. 통합진보당의 진성당원은 3만명이 넘고, 당비를 내지 않는 이들까지 합하면 10만여명이다. 그런데도 다수파가 당을 장악해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이번 결정은 전가의 보도로 쓰일 것이다. 북한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정치세력을 공격하기에 딱 알맞다. 흑백논리가 통하는 사회에서 이번 심판의 근거들은 앞으로 생각이 다른, 특히 집권세력의 정책에 반대하는 소수파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와 권위주의 세력에 맞섰던 국민의 지난한 저항을 통해 그나마 발전해왔다. 하지만 이제 헌재와 정부가 이를 부정해버렸다.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문상배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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