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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31 18:48 수정 : 2014.12.31 18:48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또 한해가 저물었다. 대학교수들이 혼란스럽고 마음 아팠던 지난 한해를 담은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골랐다고 한다. 참 많은 걸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다. 분명히 사슴인데 그걸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긴다는 뜻이니, 우리 사회가 지난 몇년 동안 겪어온 문제의 핵심을 짚은 뜻있는 지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사자성어의 출전인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가 전하는 상황을 우리의 오늘과 비교해 보면 반밖에 맞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사슴을 끌어다 놓고 그걸 말이라 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자들이 그 한쪽이다. 또 다른 한쪽은 사슴인 건 분명한데 그걸 사슴이라 해야 하나 말이라 해야 하나 번민하는 사람들이다.

등장인물의 한편인 권력자들을 비교하면 진나라의 이야기에서 오늘의 우리를 볼 수 있다. 하지 못할 일이 없는 듯한 무소불위의 태도가 그렇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함 역시 다르지 않다. 환관 조고는 실로 무엇이든 했다. 진시황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때에 따라 수라상을 들이고 백관의 주청을 받아 황제에게 올리는 척했다. 심지어 썩어가는 시신의 냄새를 숨기기 위해 수레에 전복 한 가마를 함께 실었다고 사마천은 적었다.

진시황이 순행중 외지에서 죽었으므로 정국의 안정을 위해 발표하지 않았다는 핑계가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권력투쟁이었다. 환관 조고는 어린 황자 호해를 황좌에 즉위시키고, 황권을 넘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건 결국 이세황제 호해를 완전히 무력화하려는 권력투쟁의 일환이었다. 황자들과 힘있는 대신, 관리들이 모두 죽고 나니 호해는 아무 힘도 없었고, 모든 권력은 조고의 손안에 있었다. ‘지록위마’는 바로 그 새로운 권력관계를 확인하려는 수순이었다. 황제에게 말이라며 사슴을 바치고, 황제가 조고의 착오를 지적하자 좌우의 군신들에게 말이냐 사슴이냐 물었다니, 무소불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올 한해 우리가 지켜보아야 했던 일들과 참으로 많이 닮아 있다.

지적해두고 싶은 건, 지록위마의 고사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이다. 이세황제 호해는 조고의 아들 염락의 압박 아래 자살하고, 조고 역시 자신이 꼭두각시로 세운 새 임금 자영의 손에 살해된다. 자영이 왕위에 있던 시간 또한 고작 달포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록위마의 문제를 보인다고 해도 진나라와의 비유가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록위마’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는 건 등장인물의 다른 한편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말이냐 사슴이냐를 묻는 조고의 질문에 대해 세가지의 반응이 있었다고 적었다. 어떤 이는 침묵했고, 어떤 이는 말이라 해서 조고에게 아부했고, 어떤 이는 사슴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조고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2014년 우리 사회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한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두려움은 고사하고 번민을 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사슴을 말이라 한 건 같을지 몰라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누가 시키기도 전에 기꺼이 그렇게 한 사람들은 환관 조고에게 아부한 사람들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혹시 총리, 헌법재판소장, 장관 등의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게 그들에게는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일까.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동료 교수들이 2014년의 사자성어로 고른 ‘지록위마’ 앞에서 내가 망설이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의 언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도 글줄을 꽤 읽은 사람이긴 하지만, 올해 우리 사회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학식의 멋이 너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내게 고르라고 했다면 ‘단장지통’(斷腸之痛)까지 갔을 것 같다. 새끼를 빼앗긴 채 통곡하던 어미 원숭이가 창자가 한 치 간격으로 끊긴 채 죽었다는 처절한 이야기를 담은 표현이다.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꽃봉오리들을 생각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숱한 어린 생명을 잃은 부모들을 생각하면,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잊지 않도록 하는 이 성어가 적절할 것 같다. 조금 너무 직설적이기는 해도 지난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잘 담아낸다는 느낌이다.

유형규 미국 리드대 교수·중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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