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1.19 18:46 수정 : 2015.01.19 18:46

시어머님은 정말 순하디순한 분이셨다. 엉터리 며느리였건만, 단 한 번도 어머니께 꾸중 들은 기억이 없다. 어머니와 나는 삶의 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나는 서울에서 문명의 이기를 듬뿍 받고 자라난 철없는 청춘이었고, 어머니는 촌에서 자라고 무학에 전쟁을 겪으신, 아껴 쓰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아는 노인이셨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고깃근을 자르지 않고 덩어리로 사가게 하셨다. 그게 그분으로서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꽃다발을 포장해서 들고 가는 호사는 그분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어느 날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니는 다시는 집 밖으로 못 나가셨다. 어머니와의 일상은 지루하고 우울했다. 그즈음에 아는 선배언니가 우리 집 근처에서 꽃꽂이 강습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집살이에 매인 내가 안돼 보였는지, 꽃값만 들고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한 시간 외출이 시작되었다. 꽃 몇 송이와 조촐한 소재들을 침봉에 꽂고, 사범님의 평을 듣고, 내가 꽃꽂이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고스란히 집으로 싸들고 와서 그대로 다시 꽃아 놓는 게 다였지만, 그 꽃꽂이 수업은 나에게는 호사스런 행사였다. 어머니는 뭐라 내색은 안 하셨지만 도저히 그 꽃꽂이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런 어느 날, 절룩이며 거실에서 걷는 연습을 하던 어머니가 꽃 앞에서 오락가락 망설이시더니 내게 물으셨다.

“얘야, 저게 혹시… 옥잠화 이파리 아니냐?” “네, 어머니 옥잠화래요.”

그때 어머니의 얼굴이 어찌나 환하게 빛나던지. 당신의 고향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옥잠화를, 며느리가 비싼 돈 주고 사서 꽃꽂이로 꽃은 것이 그렇게도 신기하셨나 보다. 그날부터 어머니의 운동 시간이 길어지셨다. 안방 문 앞에서 거실까지 겨우 몇 걸음이지만 며느리가 꽂아놓은 꽃이 목적지가 되어서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을 왕복을 하셨더랬다. 며느리가 꽁꽁 싸온 꽃들을 펼치고 꽂을 때는, 바짝 다가앉으셔서 하나씩 살펴보시며 꽃향기를 맡으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꽃다운 처녀 시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애를 썼건만 몇 번의 재발 끝에 몸은 점점 더 스러져가고 나중에는 정신도 흐려지셨다. 그래도 며느리의 꽃은 언제나 예쁘다고 칭찬해주셨다. 어머니 인생에서 말년의 병치레는 엄청난 고통이고 수치였으리라. 그 힘든 시간, 꽃들이 위로가 되었을 거라 믿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편은 옥잠화 몇 포기를 어머니 무덤가에 심어드렸다. 값비싼 비석이나 상석보다 옥잠화를 더 반기셨을 거라 믿는다.

다음해 초여름에 가봤더니, 우리 어머니 웃는 얼굴처럼 하얀색 옥잠화 꽃이 처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피어 있었다. 꽃꽂이 소재로 옥잠화 이파리만 사용했었지 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부끄럽고 못난 며느리지만, 어머님 살아생전에 매주 새 꽃을 보여드렸던 것, 그거 하나는 잘한 일이지 싶다.

이선희 드라마 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