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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19 18:47 수정 : 2015.01.19 18:47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한 학기 노고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뒤늦게나마 드려야 하는데, 그보다 다음 학기부터는 강의를 부탁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문으로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교양과목 종류와 분반 수를 줄이고 강좌당 수강인원을 늘리겠다는 대학의 ‘경비절감’ 방침이 나왔습니다. 한두 대학만의 일도 아니고, 또 아주 새로운 일만도 아니기에, 그 방침이 가당치 않다는 비판을 굳이 소리 높여 반복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같은 등록금 받으며 과목 종류와 수를 줄이고 수강인원을 늘리는 대학이 같은 값에 과자 용량을 슬쩍 줄여 파는 제과회사와 다를 바 무엇이냐 싶어 학생들 보기가 민망하지만, 대학인들 위법이 아닌 한에서야 ‘경비’를 줄일 자유와 핑계가 왜 없겠습니까. ‘입시시장’, ‘입학자원’, ‘교육단가’, ‘대학경영’ 같은 말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적 언어로 통용되는 현실에서, 대학의 본연적 정의(定義)와 이념을 따지는 것은 이미 무의미한 일인지 모릅니다. 가르쳐야 할 것을 회계의 영혼이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외침은 그러니 그만두지요.

그러나 대학의 또 다른 구성원이었던 선생님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입니까. 오랫동안 신분의 불안을 감내하며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쳐주셨으나, 얄팍한 강의료 외에 대학이 드린 것은 ‘외래교수’라는 정처 없는 명칭이었을 뿐. 그리고 이제 통보도 없는 해촉이 남았습니다. 생계도 생계지만, 학계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하다못해 연구재단 프로젝트라도 신청하려면 그래도 대학 강의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강사의 삶을 겪어봤기에 절감하는 그 사정은, 방금 말한 대학의 ‘자율적’ 경비절감 방책뿐 아니라 다가오는 강사법에 의해 깡그리 무시될 것입니다. 인간인 강사의 어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강사제도를 없애겠다는 그 법은, 다수의 강의를 수거해 소수에게 몰아줌으로써 대학에 깃든 다수의 어려운 삶을 덮어버릴 뿐 아니라, 학자 개개인이 깊이 파고드는 지식의 다양성을 가르침의 장에서 영영 내몰고 말 것입니다. 애써 눈감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모를 리 없는 강사법의 이 기망은, 발 빠르게 법 시행에 대비하는 대학의 ‘근면’에 의해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기야 강사법뿐인가요. 전임교수 강의 비율이라는 정부의 오랜 대학평가 지표에 대학은 강의전담교수니 교육중점교수니 하는 온갖 비정년트랙 전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대응해왔으니, 정부와 대학의 ‘지표 담합’ 속에서 강사의 삶이 농락되고 배제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을 내리라 하는 대학에 대한 한탄은 그러나 기어이 제가 그 안에 속해 있기에 답 없이 깊어만 갑니다. 총장으로 육화된 기업의 영은 일단의 비정규직을 하선시켜 가벼워진 배를 기름처럼 바람처럼 밀고 나갈 것이고, 저는 그 뱃전에 흔들리며 남아 학생들에게 ‘인성’과 ‘창의성’을 가르칠 것입니다.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다른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얻도록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사랑 없이 희망만 있다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복을 바랄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바랄 수 있다고. 네 행복은 네 일이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네가 잘되고 못되는 건 네 소관이라는 본능적 발상에 제동을 거는 것, 그리하여 자연을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를 의무로 만드는 것,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연대라고 옮겨도 무방한 여기서의 사랑을 ‘남은 교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부재하는 강사가 존재할 것이니, 그 뚜렷한 존재를 교재 삼아 연대의 희망을 가르쳐야 하는 걸까요. 칼바람 부는 70m 굴뚝이 차마 함께 시린 겨울입니다. 공장 안에서도 공장 밖에서도 바라보이는 그 등대가 하물며 대학 안에서도 바라보이니, 대학 밖의 선생님, 모쪼록 계속 그리고 다시 함께합시다.

김율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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