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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어린이집 폭행사건, 젠더적 시각 필요하다 / 구본기 |
어린이집 폭행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폭행 피의자의 신상이 낱낱이 파헤쳐져 온라인 공간을 떠돈 지 오래다. 그런데 이렇게 ‘신상털이’ 따위로 그 보육교사를 사회에서 매장하면, 아니, 우리네 화를 실컷 풀고 나면, 앞으로는 같은 일들이 생겨나지 않는 걸까?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우리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 걸까?
서가에서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쌤앤파커스, 2011)를 다시 꺼내어 읽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오래된 믿음’ 5가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시스템적 문제에 대한 책임의 개인화’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11 테러는 오사마 빈 라덴 개인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래서 사건 직후에 그렇게도 그를 저주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하고 나니 알카에다에 의한 미국 내 테러 문제가 해결이 됐는가?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시스템적 문제에 대한 책임의 개인화가, 대중의 분풀이에 제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아주 낡고 비이성적인 이 방식은, 사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질 못한다. 시스템적인 문제는 시스템적인 해법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생한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그렇다. 폭력을 행사한 교사에게 화가 나는 맘은 십분 이해를 한다. 그러나 그 교사에게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서는 아무것도 바뀌질 않는다. 그가 진 죄는 곧 법이 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슴속에 이는 이 에너지를, 조금 더 유용한 곳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요 근래부터 이 사건을 노동 문제(시스템적 문제)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두드러지는 논점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어린이집 교사로의 진입 장벽이 초·중 교사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점(자격 검증의 문제), 그리고 둘째, 받는 급여에 비해 일의 강도가 매우 높다는 점(처우의 문제). 18일에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를 통해서 소개된 서울대 이준구 교수의 ‘효율임금이론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집 사건’이라는 글이, 이 두 문제를 비교적 잘 요약정리하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일독해 볼 것을 권한다.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해볼까 한다. 이번 사건은 노동 문제만이 아닌 젠더(성차별)의 문제로도 함께 확장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두 문제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한 몸이다. 이참에 우리가 ‘가정 내에서 여성 또는 아내, 어머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남자의 것이 아닌 일)로 치부하는 많은 것들(청소, 빨래, 육아 등)을, 우리는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현재 시장에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그것들이, 과연 어떠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지, 또 그 제공자(노동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19일,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어린이집 폭행 사건의 재발 방지 대책에 관해 “할머니들을 오전 오후에 한번씩 어린이집으로 출근하게 해 참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봐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갇힌 남성들이 궁리할 수 있는 게 딱 여기까지이다. 육아는 언제나 ‘여자, 아내, 어머니의 마땅한 희생’ 또는 ‘그까짓 거, 애 보는 거? 아무나(여성이) 하는 거!’인 것이다. 남성이 육아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지 생생하게 그려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사회, 정치, 제도, 이데올로기는 모두 남성이 만든다. 어린이집 교사를 떠올릴 때 남성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어린이집 교사는 오직 여성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집 교사의 각종 처우가, 또 진입 장벽이 초·중 교사에 비해 열등한 까닭이다. 이번 어린이집 폭행 사건의 제1원인은, 성차별에 있다. 젠더적 시각이 요구된다.
구본기 구본기재정안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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