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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9 18:46 수정 : 2015.06.29 18:46

해리 트루먼은 당초 발군의 정치인은 아니었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1944년 미국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가 된 것도 그의 능력 덕분이 아니었다. 당시 대통령 루스벨트는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부통령이던 월리스는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웠다. 민주당 지도부는 월리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새로운 부통령 후보를 물색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반공주의자 트루먼이었다. 루스벨트가 4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트루먼은 부통령이 되었다. 3개월도 못 돼 루스벨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트루먼은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자리였다.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트루먼은 미국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잘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2차대전을 미국의 승리로 끝냈고, 마셜 계획으로 유럽을 살려 소련의 팽창을 막는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누구냐’는 조사를 하면 상위에 자리를 잡는다. 한국전쟁에 신속하게 개입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트루먼을 ‘그저 그런’ 정치인에서 ‘괜찮은 대통령’으로 만든 요인은 여럿이다. 밝은 성격, 신의, 친화력 등등. 특히 반대 측인 공화당 의원들과도 스스럼없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준 친화력은 정치인 트루먼의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신뢰를 얻게 해준 것은 강한 책임의식이었다.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명패가 있었다. 거기엔 그의 이름 대신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책임은 여기에 있다.”(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트루먼은 주요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이 나무패를 보았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맥아더를 해임할 때도,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 조달을 위해 미국 전체의 제철소들을 압류할 때도 이 패를 보았을 것이다.

트루먼의 모토에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비추어 본다. 더없이 생경하다. 어려워진 경제로 서민들의 고통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할 것”이라면서 온통 책임을 국회에 떠넘기는 대통령, 메르스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 삼성서울병원 원장을 불러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대통령은 트루먼을 비웃는다. “책임은 여기 아니고 저기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면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적이다. 체화되어 있다. 경제상황에 대해 말하면서는 “우리 경제가 참 불쌍하다”고도 했다. 국회에서 필요한 법률을 빨리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경제가 어렵다는 얘기였다. 세월호를 두고 유병언 같은 탐욕 행각은 방치하지 않겠다고 한 건 책임이 기업에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고 진정성을 보이라고 외치는 것은 동토와 같은 남북관계의 책임을 모두 북한에 돌리자는 것이다.

‘책임이 저기 있다’는 말의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사안을 꿰뚫어보지 못하거나, 뭔지는 알겠는데 제대로 해결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국민은 불안하다. 현대의 안보는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것만이 아니다. 국민을 내외부의 불안 요소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안보다.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안보는 북한을 악마화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한-미 동맹을 강화한다고 해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책임의 시작은 1인칭 화법이다.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제가 추진하겠습니다’ 식의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에는 그런 것이 드물다. 대신 3인칭 당위형의 과잉이다. ‘해야 한다’ 화법이다. 국회가 해야 하고, 검찰이 해야 하고, 보건당국이 해야 하고, 병원이 해야 하고…. 심지어 국민도 해야 한다. 권컨대 대통령은 우선 명료한 1인칭 화법을 연습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트루먼의 고별사도 한번 새겨볼 일이다. “결정은 대통령이 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안문석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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