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1.20 18:47
수정 : 2016.01.20 18:47
황당한 글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을 착취하는 최저임금 이하의 일자리라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며 ‘열정노동’이라고 자기기만에 취해 있었다.”(<중앙일보> 1월12일치 장하성 칼럼 ‘‘헬조선’을 ‘헤븐 대한민국’으로’)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열정노동’은 내가 공저했던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열정+노동’이라는 낯선 개념을 만들게 된 것은, 사실상 강요된 자발성을 빌미 삼아 노동의 가치와 대가를 깎아내리는 행태와 구조를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발성이 ‘그러므로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겠다’와 연결되는 새로운 착취구조가 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열정노동은 이후 등장한 ‘열정페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고, 그것을 통한 청년들의 저항도 산발적으로 있어왔다. 어쨌거나 열정노동, 열정페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이지,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기만에 빠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장하성 교수는 이 개념을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한 셈이다.
물론 가벼운 실수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들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을 오용하여 청년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해놓고선, 청년에게 세상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좀 모순적이다. 그간 많은 청년들이 학술적·정치적인 방식으로 현재의 세계를 인식하고 변화의 지점들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비록 이런 노력들이 미진하고 실패했을지언정 면밀한 검토도 없이 청년들이 ‘순응해왔으나 요즘 들어 변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다. 무엇보다도 요즘 들어 변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이른바 ‘헬조선’ 담론이라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헬조선, 그리고 수저계급론이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헬조선 이전의 청년들이 자기기만에 빠져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은 생뚱맞은 이야기다. 2007년 <88만원 세대> 이후로 청년들은 현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 수많은 모색들을 해왔다. 그럼에도 많은 청년들은 한국 건국 이래로 가장 영향력 없는 20~30대를 보냈고, 청년을 위한다던 수많은 말들은 대부분 부도수표가 되어 사라졌다. 헬조선은 이런 실패와 기만의 폐허 속에서 등장한 것이고, 그 과격한 수사와는 다르게 짙은 체념의 정서로 가득하다. 헬조선은 바꿀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땅이고, 그래서 청년들은 더더욱 각자도생의 운명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헤븐 대한민국’이 아니라 ‘탈조선’을 꿈꾼다.
헬조선은 청년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기뻐해야 할 신호가 아니라, 그들이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지금 청년들에게는 자원도, 경험도, 기회도 없다. 행동하기 위해 시위라도 나갈라치면 수백만원에 이르는 경찰의 벌금통지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온다. 차별과 위계의 문화가 청년들을 촘촘한 격자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곳을 지키고 변화를 위해 싸울 이유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함께 힘을 합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겠다는 이들조차도 청년들을 데려다가 ‘열정노동’을 시켰고, 손톱만한 권한과 자원을 제공하는 것을 빌미 삼아 청년들 간의 무한경쟁을 주문하는 오디션 장을 열어대기 일쑤였다. ‘청년이여 행동하라’는 ‘행동하지 않는 청년은 개새끼다’로 곧잘 바뀐다.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사회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이 빈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자기방어적인 냉소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노력을 대체하는 혐오다.
청년들의 상처받고 차가운 심장을 깨우는 일은 공허한 말이나 당위로는 불가능하다. 청년의 등을 떠밀었던 수많은 손들은 모두 청년을 동원의 대상으로 보았기에 차가운 냉대를 받아왔다. 모름지기 사람을 움직이고 싶다면 이른바 ‘쏘울’이 필요하다.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최태섭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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