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3 18:17
수정 : 2019.03.14 12:54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화방송>(MBC) 사장이 된 최승호 피디가 조작간첩 문제를 다루었던 영화 <자백> 시사회에 갔었다. 알았는지 몰랐는지 25년을 알아온 서승 선생님을 바로 옆에 앉혀주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에 재심 청구를 하여 승소한 사람들의 리스트가 빠르게 스크린 아래로 흘러내릴 때다. “유우성 사건 하나만 가지고 2시간 영화를 봤는데 비슷한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그런데 서승 선생이 원조 조작간첩 아니던가? 그에게 물었다. ‘후배’ 피해자들이 모두 재심 청구를 하고 있는데 왜 재심 청구를 안 하시나요? “조작간첩 문제는 국가범죄인데 국가가 스스로 조사를 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사죄하고 보상을 해야지,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법원에서 입증을 하라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 법원은 당사자주의에 입각해서 두 상대방이 적대적일 것을 전제로 ‘분쟁'을 해결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배상소송도 당사자인 국가는 세금을 아끼겠다는 결의로 시작한다. 국가범죄임이 명백히 밝혀진 사안들을 다루기에는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모욕적인 절차다. 나 스스로도 2016년 말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국가배상 집단소송을 준비했는데, 이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자발적인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이후 정권이 바뀌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문재인 정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등 박근혜 정부의 국가범죄에 대한 국민의 분노에 터잡아 들어선 정부다. 문재인 정부는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진상규명을 했다. 그렇게 피해가 밝혀진 이들에게 법원에 가서 일일이 따지라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인정한 국가범죄에 대해 자발적인 보상을 하지는 못할망정 피해자들이 간신히 1심을 이기자 다시 항소해 더욱 이들을 모욕하고 있다. 국가는 한편으로는 블랙리스트 백서를 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원에서 예산 절감 모드로 똬리를 틀고 “손해배상액수가 너무 많다”며 항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피해자별로 다양해서, 또 정부의 자발적인 보상 의사가 불분명해서 피해자들이 법원의 절차를 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번 사건이 그런 경우라면 국가는 항소하지 않았어야 한다. 이럴 거면 소 취하 하고 정부의 자발적 배상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법원에 가도 이런 식으로 깎아가며 피해자들을 욕보일 거라면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배상을 하는 것에 비해 액수가 더 많아지지도 않을 것 같다.
손배액수가 너무 많다고? 지금까지의 손배액수를 기준으로 하면 1500만원, 2천만원이 많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민사 손해배상제도는 거의 법치주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하게 운영돼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죽음의 고통에 대한 기본 위자료가 1억원, 두 눈 모두 실명한 것에 대한 기본 위자료가 아마 그 절반 정도였다. 답답한 것은 법령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이 스스로 정한 것이어서 강제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법부 재량 침해의 문제 때문에 인위적으로 바꾸기도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으니 법관이 소신있게 손배액수를 정했다면 그것을 알려서 다른 법정에도 공정한 손배액수가 자리잡도록 할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사 손해배상제도를 더욱 공정하게 만드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번 판결을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부가 이렇게 의미있는 판결을 함부로 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예술인들이 스스로 피해를 1500만원 또는 2천만원으로 정하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문제일 것이다. 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기간 내내 정부 및 정부 산하기관으로부터 지원 기피 대상이 되어온 피해에 대한 적절한 배상이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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