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데서 출발하는 우리 사회의 이 비루한 천민자본주의적 삶의 문법을 지금부터라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제2의 황우석 사태는 이미 예견되어 있다. 황우석 교수 논문조작 파문이 이제 그 정리를 위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서울대 조사위는 마침내 황 교수가 지녔다고 주장하는 원천기술의 가치마저 부정했고, 이제 남은 것은 ‘범죄의 재구성’뿐인 듯이 보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 아쉬운 모양이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새로운 희망 찾기에 나서고, 심지어는 황 교수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아쉬워해야 할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가?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를 수립하려 했던 황 교수 팀의 연구는 단순히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 연구에는 우리 사회 전체의 어떤 욕망, 곧 세계 제일의 경쟁력 있는 기술을 통해 우뚝 설 위대한 선진조국에 대한 욕망이 표출되어 있었다. 이런 욕망이 없었더라면 그 연구는 발상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고, 발상되었더라도 충분히 지원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황 교수 파문이 그처럼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된 것도 바로 그 욕망이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비판자든 지지자든 모두들 그 욕망만은 공유하고 있었고, 바로 그래서 원천기술의 유무와 조작의 정도에 모두들 그렇듯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비판자들도 공유하고 있는 이 욕망 그 자체의 원천적 병리를 되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맞춤형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연구의 비전은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윤리적으로 매우 끔찍하다. 그것은 단순히 난자 수급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이런저런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인간 생명의 복제 가능성이나 그 도구화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그처럼 손쉽게 처리하고 말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서양의 기독교 전통과는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기에 그런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난치병 극복’이라는 명분은 많은 윤리적 주저에 맞설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도덕적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황 교수 팀이 주장했던 것처럼 분화가 시작되지 않은 수정 뒤 14일 이전의 배아는 완전한 생명체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조작과 연구가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볼 일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 식의 주장은 예컨대 갓 태어난 신생아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불구로 태어난 신생아는 죽여도 좋다는 식의 주장과 곧바로 통할 것이고, 단지 기독교도만이 그런 주장을 경악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무리 ‘난치병 극복’이라는 도덕적 명분이 그 자체로 훌륭해 보이더라도 그 명분만으로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기에, ‘잠재적 인간 생명체’인 배아에 대해서도 그에 합당한 최소한의 존중만은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연구는 이런저런 윤리적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따져 가면서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필요한 최소한의 토론마저 생략했다. 하루빨리 확인받아야 할 ‘세계 최초’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근원적인 윤리적 결함에 눈을 감고서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 전체가 많든 적든 공유하고 있는(피디수첩의 취재윤리 문제의 본질도 바로 이것이다) 이 병든 욕망이야말로 난자 채취 과정의 강압이나 논문 조작을 낳은 토양이 아니었겠는가? 이번 파문에는 우리 사회의 삶의 양식이 지닌 도덕적 문법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고, 우리가 참으로 돌이켜보아야 할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데서 출발하는 우리 사회의 이 비루한 천민자본주의적 삶의 문법을 지금부터라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제2의 황우석 사태는 이미 예견되어 있다. 하긴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 교실에서 확인되는 심각한 남초 현상이 ‘여아 낙태 암시장’의 존재를 그렇게 강력하게 지시해 주고 있어도 애써 그런 사실을 나 몰라라 했던 우리 사회에서 황우석 사태의 윤리적 결함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장은주/영산대학교 교수·철학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