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05 18:20
수정 : 2006.02.0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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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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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처음엔 태산이 울릴 정도로 요란을 떨더니 결국은 시시한 쥐꼬리로 끝난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인 듯싶다. 바로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씨 집에서 압수한 도청테이프 274개의 처리 문제다. 이 테이프의 처리 방향을 놓고 온 나라가 요동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버렸다.
도청테이프에 대한 관심의 실종은 2월 임시국회 전망을 다룬 언론들의 분석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사립학교법 재개정 협상, 장관 인사청문회, 황우석 교수와 브로커 윤상림씨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추진 등 ‘굵직굵직한’ 현안에 밀려 도청테이프 문제는 겨우 ‘기타 안건’의 초라한 말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도청테이프 처리 문제가 뜨거운 감자임은 분명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까짓 뜨거운 감자 하나쯤은 통째로 삼킨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체질이나 소화력은 그 정도는 너끈히 감당할 만큼 튼튼해졌다. 정 뜨거우면 적당히 식혀 가면서 먹으면 되고, 그만큼 시간도 충분히 흘렀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너무 식어 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 다시 도청테이프 문제를 거론하면 “그 사건이 종치고 막 내린 게 언제인데 이제 와서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면박을 당할 지경이 됐다.
뒤에 일어난 사건이 앞의 사건을 잡아먹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는 일종의 전통이다. 아무리 경천동지할 사건이라도 또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앞선 사건은 후발 사건에 밀려 소멸해 버린다. ‘후발사건 독식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도청테이프 문제도 황우석 교수 사건에다 사립학교법 파동 등에 밀려 시야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사건의 성격이 다른만큼 사안별로 ‘동시진행’을 해도 될 법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러니 ‘지은 죄’가 있어서 도청테이프가 공개될까 노심초사하던 우리 사회의 힘깨나 쓰는 인사들은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까.
도청테이프 수사와 공개를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기류는 대략 두 갈래다. 첫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도 바쁜 판에 과거를 들쑤셔서 어쩔 셈이냐는 식의 타박이다. 흘러간 레코드를 더는 틀지 말자는 주장은 독수독과론의 법률이론으로 튼튼하게 무장엄호를 받고 있다. 둘째는 진상규명의 기대를 포기해 버린 데서 나오는 불신과 냉소다. 누가 봐도 혐의가 뚜렷한 삼성의 불법 로비 의혹도 무혐의로 넘어갔는데 다른 도청테이프들을 더 조사해 본들 별수 있겠느냐는 자조와 무력감이다.
여야 정치권도 체면상 겉으로는 협상 가능성을 말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학업에 별로 뜻이 없어 보인다. 특히 특검법안까지 내놓으며 기세를 올렸던 한나라당은 이제 와서는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 뒤로 빠지는 모습이다. 2월 임시국회가 끝나면 어차피 정국은 지방선거 국면에 빠져들테니 도청테이프는 영영 지하에 묻힐 운명이다. 정치권으로서는 뜨거운 감자를 용케도 잘 식혀서 성공적으로 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우리의 과거사를 돌아보면 맺고 끊음이 분명치 않게 넘어간 사건들은 두고두고 통증의 원인이 됐다. 우리의 고질병인 역사적 변비증의 주범은 다름아닌 건망증과 체념이다. 그런데 또다시 그 병이 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검찰이 밝혀내지 못한 엑스파일의 혐의 내용을 포함해 도청테이프에 대한 전면적 특검 수사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그런 통증을 사전에 막고 더욱 건강한 체질을 만들기 위함이다. 정치권이 어떻게 할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자.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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