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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5 21:56 수정 : 2006.02.15 21:56

김효순 편집인

김효순칼럼

22살의 나이 차가 나는 두 언론인의 대담이 일으킨 파장이 국제적으로 계속 번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 〈논좌〉 최신호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신랄하게 비판한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그룹 회장 겸 주필과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이 화제의 주역이다. 안보·개헌 등의 쟁점에서 논점을 달리해 온 두 신문의 사설 책임자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로 대아시아 외교가 망가지고 있다고 인식을 같이했다는 점에서 요미우리와 아사히의 공동투쟁, 공동전선 형성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두 신문의 차별성 못지않게 두 사람의 경력과 성격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베쓰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와타나베는 보수정계, 언론계의 막후 실력자이자 해결사였다. 석 달 뒤면 여든이 되는 그는 마피아 조직의 대부에 빗대서 ‘돈’으로 불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전쟁기간 중 반군국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전후 도쿄대 철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다 ‘천황제’를 타도하려고 공산당에 입당한 전력이 있다는 점이다. 당 규율과 개별적 자유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논쟁을 일으켰다가 출당 조처를 당한 그는 1950년 당시로서는 지방지 수준이었던 요미우리신문사에 입사해 주로 정치부에 근무하면서 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정치부장, 논설위원장, 주필, 사장, 회장으로 승승장구한다.

출세의 발판은 55년 자민당 결성 때 주역이었던 오노 반보쿠의 담당기자로서 밀착하며 다진 연줄이었다. 보수정계에서 친대만파의 총수였으며 뒤에 한-일 수교 교섭에도 관여를 했던 오노 진영과 어울리며 언론인의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들었다. 후에 총리 자리에 오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처음 입각했을 때 요정에서 술을 마시던 와타나베를 찾아와 “덕분에 장관이 됐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와카미야 논설주간은 현재 일본 언론인 중에서 지한파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지난해 3월 시마네현의 결의로 독도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공동관리가 불가능하다면 아예 한국에 양보해 버리자는 몽상을 한다는 칼럼을 썼다. 95년에는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경쟁이 과열기미를 보이자 공동개최를 제의하는 사설을 쓰기도 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계속되던 81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1년 동안 연수를 한 것이다. 잘나가던 정치부 기자였던 그가 서울 연수를 하겠다고 나서자 선배들이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 미국 연수, 워싱턴 특파원 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아사히 엘리트 기자들의 정석 코스를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수십년에 걸쳐 요미우리에서 ‘폭군’으로 군림했던 와타나베의 뚝심과 와카미야의 지성미가 결합된 ‘야스쿠니 공투’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가 한국, 중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야스쿠니 참배를 비판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주로 와타나베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와타나베가 참배 반대 투쟁에 나선 것은 자신의 전쟁체험과 직결돼 있다. 전쟁 말기 이등병으로 징집돼 고생을 했던 그는 개전 내각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또한 독불장군처럼 처신하고 있는 고이즈미가 자신의 훈수를 뭉개고 있는 것에 대한 노여움도 많이 작용한 것 같다. 여든 고개에 이른 거물 언론인 나베쓰네의 마지막 전투가 일본의 진로를 크게 좌우할 9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거리다.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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