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0 19:00
수정 : 2006.02.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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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평화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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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동북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가고 있지만 동북아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입구는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마침내 오랫동안 자민당을 지지해온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 겸 주필이 지난 11일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역사도 모르고 교양도 없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음지의 쇼군이 일본을 바꾸기 위해 양지로 나섰다”고 머릿기사를 뽑았다.
와타나베 회장의 ‘발언 행위’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일본 시민사회는 전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국회 답변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이미 아시아가 일본의 안중에는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이즈미라는 정치지도자 개인의 지도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 정계의 우경화 현상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자신들의 국가를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서 아시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절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북아가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이루기에는 국가 자체만을 보더라도 지극히 비대칭적이다. 경제규모, 영토의 크기와 인구,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장 정도에서 큰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개방된 사회주의 중국과 폐쇄된 주체사상의 북한, 분단체제 아래 자본주의 국가 한국, 그리고 ‘천황제’와 공존하는 자본주의 국가 일본 등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정치 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한해 동안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매우 빈번하게 한국사회를 방문하고 여행했다. 그들의 방한은 한국 시민운동의 역동성을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을 넘어서 있었다. 한국을 통해서 동북아시아로 들어가는 입구를 모색해보려는 것, 그래서 한-일 연대를 통한 동북아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여기에는 일본 시민사회의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간절하게 느껴졌다. 일본 시민운동이 횡적으로 협력하지 않아 초래된 연대의 결핍과 그로 인한 국가 개혁에 대한 좌절감이 이들에게 절망이라면, 희망은 이웃나라 한국의 운동 에너지가 일본 시민사회에도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동력이 되어 주길 바라는 것이다. 일본의 ‘나이든 시민사회’가 상실한 에너지를 한국의 ‘젊은 시민사회’에서 찾으려고 이들은 애썼다. 일본 시민운동은 한국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의 비대칭성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은 어쩌면 와타나베 회장의 말처럼 이러한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교양’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교양은 한편으로는 이웃에 대한 무지를 극복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의 교양을 높이는 일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 시민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입구는 동북아의 교양을 쌓는 일이고 교양 있는 태도로 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의 교양을 높이는 일이란 우리가 일궈낸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화는 정권을 바꾸고 국가를 개혁함으로써 개혁정부에 모든 권한과 과제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 그 자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운동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는 일, 그래서 연대의 힘을 키워가는 일이 중요하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민사회의 동력은 무엇일까.
이기호/평화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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