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2 19:01
수정 : 2006.02.2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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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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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자학사관’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는 표현이 뒤따른다. ‘자유주의’라는 말과 함께 ‘뉴 라이트’라는 말도 등장한다. ‘보수혁명’이라는 용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역사 수정주의의 집단화도 진행된다. 해방 전후사를 ‘재인식’하고, 대일협력 문제를 ‘재조명’하고, 독재체제 아래 근대화 문제를 ‘재평가’하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식민지 근대화론 역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빠질 수 없다. 그 모든 주장들의 종합선물세트로 제기되는 것은 국민교육 ‘재구성’의 요체인 교과서 개정 문제다.
이것은 2000년을 전후하여 한국사회에 등장한 이른바 신우익의 집단화와 담론의 조직화 양상을 핵심용어 중심으로 간명하게 발췌한 것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용어조차도 ‘표절’이라는 것이다. 간명하게 말하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대두되는 신우익들의 다채로운 결집과 담론생산의 양상은 1990년대 일본 사회에서 집단화한 신우익의 결집과 담론생산 과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90년대의 일본의 국민정서를 장악한 것은 ‘불안’이었다. 거품경제가 붕괴됨으로써 경제대국 일본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한국과 유사하게 기업을 가족공동체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종래의 고용구조와 기업문화 역시 구조조정기를 거쳤다. 기업 도산이 속출하고 외국자본에 의한 일본 기업의 인수합병이 가속화했다. 지도층의 부패 추문이 연이어 터졌고, 젊은이들의 탈정치화가 가속됨으로써, 일본 사회에 대한 체제 긍정과 미래 전망이 폐쇄상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불안의 시대’였고, 붕괴감이 일본 사회의 멘탈리티를 안개처럼 포위해가고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90년대를 기점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신우익 그룹의 출현의 근거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곧 90년대 일본의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의식의 상실이라는 위기상황이 신우익의 대거출현과 결집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출현한 신우익은 일본인의 ‘국민적 정체성’의 재구성의 기제로 역사해석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른바 ‘패전사의 재인식’이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45년은 우리에게 광복을 뜻하지만, 일본 쪽에서는 이를 패전으로 인식한다.
패전 후의 일본사회는 평화헌법 체제로 요약된다. 배외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군국주의의 과거사는 그것이 비록 미군정이라는 타력에 의한 수정과 비판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자기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관통해야 했다. 대아시아 침략과 지배의 역사가 통렬하게 반성되었고, ‘국군’의 해체와 전쟁포기 조항이 헌법 9조에 명시되었다. 굴곡이 많은 역사이긴 했지만, 패전 후의 일본 사회는 민주주의와 경제 재건의 리드미컬한 전진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일본 사회가 90년대에 이르러 직면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격심한 구조변동과 불안이었다. 이 시기 경쟁적으로 등장한 일본의 신우익들은 이 국민적인 불안을 억압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배외적 민족주의 부활의 호기로 삼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상국가’라는 구호 아래 헌법 9조 개정을 끈질기게 여론화했고,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표어를 수반한 교과서 논쟁을 통해, 패전사에 대한 인식이 자학사관으로 시종하고 있다고 선동했다.
그런 역사적 반동이 한국에서도 유사한 형식으로 집단화와 동시에 노골화하고 있다. 그런데 반동조차도 창조가 아닌 베끼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정치적 위험성과 함께 지적 허약성도 함께 음미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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