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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3 18:23 수정 : 2006.02.23 18:23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노동 현장 구석구석을 누벼온 한 문화 활동가가 얼마 전 어떤 노조의 새 집행부에 충고하는 말을 들었다. 대강 이런 이야기다. “여기저기 회의나 집회, 시위 쫓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데 다니지 말고, 진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라. 그러지 않으면 사용자 쪽의 공격이 들어올 때 조합원들은 흩어지고 노조는 망가진다.” 바꿔보자는 마음 하나로 출마했다가 ‘덜컥’ 당선된 탓에 막막함과 의욕이 교차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치곤 이상했다. 그래서 물어보니 대답은 이랬다. “수많은 노조를 지켜보니 이젠 대충 앞날이 짐작된다. 괜찮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망가지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연대와 단결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노조 상급단체에서 들으면, 노조운동 망치려는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머리를 맞대 대책을 논의하고, 뭉쳐서 항의시위나 파업을 벌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냐고 할 게 분명하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도 비슷한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노조가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 동참해야지, 내부 활동에만 매달려선 안 된다고 말이다.

물론 모두 옳은 말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활동가라고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매몰된 노조’ 만들라는 소린 아니다. 노동조건이 조금 좋아질지언정, 투기가 판치고 값비싼 과외 없인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데다 남북이 언제 충돌할지 모른다면 내 삶도 크게 나아질 게 없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개혁과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 역사가 곧 민주노조 운동이었고 그 열매의 하나가 민주노총이다.

쓰긴 이렇게 썼지만, 그리고 스스로도 민주노총 조합원이지만, 글쓴이는 노동운동가들의 심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두어달 전, 90년대 초반에 만든 노조 교육용 파업 영상을 봤을 때 받은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이렇게는 더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생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 사람의 ‘열사’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 작품이다. 특히 놀라운 건 첫 장면이다. 밤낮이 뒤바뀌어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노동자가 ‘눈을 감은 채’ 아침을 꾸역꾸역 먹는다. 제작자에게 전해들은 뒷얘기론, 집에서 밥 한끼라도 먹지 않으면 자신이 돈 버는 기계처럼 느껴져서 억지로라도 먹었단다. 그들의 싸움은 기계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와 눈물을 뿌렸건만 세상은 나아진 게 없다. 아니 더 나빠진 측면도 있다. 그래서 절망해 떠나거나 ‘이건 아닌데’ 싶지만 일터를 지키는 데 그치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운동가들도 ‘운동의 관성’으로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요즘은 민주노총까지 동네북 신세다. 말 좀 한다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노조 행태를 비판한다. 처방도 가지가지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노동운동이 절실한 사람들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의 미래가 진짜 제 문제인 이들은 따로 있다. 아직 “노조도, 세상도, 내 삶도 바꿔보자”는 마음은 있지만, 팍팍해져만 가는 일터에서 뭘 해야 할지 막막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함께 느끼지는 못해도, 한가지는 분명히 얘기해줄 수 있다. 이제 당신들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을 때가 왔다고. “노동운동은 과연 뭔가? 민주노총에 희망은 있는가?” 어차피 당신들 문제니, 더는 ‘민주노총’에 물음을 떠넘기지 말라. 이것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정말 희망이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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