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6 18:23
수정 : 2006.02.26 18:23
|
조선희 소설가
|
세상읽기
요즘 우리 또래 여자들이 모이면 3대 얘깃거리가 건강, 부부관계, 그리고 자식 문제다. 자식 얘기를 하다보면 대개 세 집에 한 집꼴로 컴퓨터에 빠져 있는 아이가 있다. 중학생인데 학교 간다고 나가서는 하루 종일 피시방에 있었다거나, 대학에 입학해 일주일 다닌 다음 방에 틀어박혀 밤잠 안 자고 컴퓨터게임 하느라 첫 학기 성적이 하나도 안 나왔다거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책가방에 교과서는 없고 판타지 소설과 만화만 수북이 들어있다거나. 심한 경우 바깥세상하고 담을 쌓은 후천적 자폐아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도 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인터넷게임과 판타지 만화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는 사정은 엇비슷하다. 컴퓨터게임을 4시간 동안 하는 중학생 아들을 야단치던 엄마가 화장실로 들어가 자살했다는 뉴스도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중1, 초등 5학년의 딸 둘과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가끔 황당했던 적이 있다. 가령, 대기오염의 해결책에 대해 “사람들이 매연을 많이 마셔주면 식물들도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라고 하더니,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는 문제는 “바닷물을 퍼내서 말리면 소금도 얻고 해수면도 낮아질 것”이라 했다. 한마디로, 만화를 너무 많이 보았다. 판타지만화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려는 것이다. 공부에는 오래 집중하지 못해도 만화책은 몇 시간이든 꼼짝않고 앉아서 다 봐치운다. 판타지 중독의 심각한 사례들은 황우석 같은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다소 과장된 소동들에서 적나라하게 보인다. “미국놈들이 한반도를 또 침탈했다. 미국놈들이 매국노들을 끌어들여 언론을 독점한 다음 분열과 혼란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일어나라. 대한민국 국민이여!”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다가 잠깐 틈을 내서 쓴 것 같은 댓글들이 게시판을 뒤덮는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절실히 판타지를 필요로 하는지 이해한다. 학교도 가정도 어디도 만만치가 않다. 또래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학교도 그렇지만 영리하고 욕심 많은 부모가 있는 가정에도 여유공간은 없다. 만일 대안의 세상이 있고 저들이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든 탈출하고 싶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찾아낸 출구가 판타지다. 판타지의 세계는, 싫증내지 않고 몇 달씩 아니 몇 년씩 은신해 있을 수 있을 만치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시장으로 삼아 ‘보다 강한 중독성!’의 모토 아래 게임을 생산해내는 업체들의 경쟁도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규범과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알게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담당하는 두 개의 공인된 기관이 학교와 가족이다. 하지만 학교의 기능은 학생 개개인의 품성과는 무관한 쪽으로 가고 있고, 가족에서도 아빠는 아이들이 10대의 지뢰밭을 지나는 시기에 자신은 ‘사오정’이 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하는 살벌한 전장에 있다. 결국, 아이 손을 잡고 지뢰밭을 통과하는 일은 엄마들 몫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지금 30~40대 여자들의 삶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제 막,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한 세대의 여자들이다.
중독에 약한 아이를 놓고 게임업체와 벌이는 싸움에서 엄마들은 무기력하다. 전업주부에게도 쉽지 않은데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인터넷게임이 공급되는 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멀티미디어 문제아를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이를 낳도록 기기묘묘한 유인책들을 내놓는 이들이 아이 키우는 환경에 대해 좀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조선희/소설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