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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6 18:28 수정 : 2006.02.26 18:28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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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87돌을 맞는다. 3·1 운동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의 청사진이다. 왜 그런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이를 말해준다.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라고 하였다. 대한민국의 법통이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을 천명한 것이다.

3·1 운동이 현재진행형이고 미래 청사진인 것은 전문 다음의 구절이 답한다.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고 하여 ‘민주개혁’의 현재성과 ‘평화통일’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법통과 정체성과 미래의 청사진은 한결같이 그 뿌리가 3·1 정신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은 한민족이 결코 일제에 2천만 동포와 3천리 강토와 4천년 역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민족적 저항이었다. 3·1 운동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상실했던 국권 회복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국맥과 법통을 승계하였다. 3·1 운동 이전의 모든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은 3·1 운동으로 결집되고, 그 이후의 민족해방 투쟁은 여기에서 발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 운동은 내적으로는 민족독립의 피어린 저항이었고, 외적으로는 아시아·중동지역에 새로운 민족해방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무저항 반영(反英)운동, 이집트의 배영운동, 터키의 독립운동을 차례로 촉발해 한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세계 만방에 선양하게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전개되고, 이것이 통합을 거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민족의 정통성과 법통을 잇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왕정복고, 입헌군주제, 사회주의 정부 등 여러 가지 정부 형태가 논의되었지만, 치열한 토론을 거쳐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승계되었다.

3·1 운동에는 몇 갈래의 사상적 배경과 항쟁의 계기가 접목된다. 첫째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인해 온 국민이 국권회복의 열망에 차 있었다. 둘째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발표로 민족지도자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등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셋째는 일본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귀국하여 3·1 항쟁을 준비하였다. 넷째는 1918년 만주 일대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만주·노령·중국·미주 등 국외 망명지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다섯째는 국내에서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의 손병희·권동진 등과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와 불교 쪽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3·1 항쟁의 기본정신은 민족의 자주독립이었다. 87돌이 되는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상태에서 ‘반쪽 자주독립’에 머물러 있어서 3·1 정신은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다. 애국 선열들이 혹독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총칼에 희생되면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한 ‘3·1 정신’을 회복하여 민족통일의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3·1 정신의 계승이고 완성이 될 것이다.

김삼웅/독립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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