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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7 18:35 수정 : 2006.02.27 18:35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세상읽기

아파트에 처음으로 이사 와서 놀란 것은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안내 방송이었다. 관리사무소, 동사무소, 부녀회 이름으로 갑자기 나오는 권위주의적인 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전체주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의 신고가 국가안보를 지킵니다. 신고 및 상담은 ….” 가끔 서울에 가면 지하철에서 흔히 듣는 방송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항상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작위의 탑승객이 듣는 방송에 간첩신고를 독려하는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시민을 국가를 위한 잠재적 신고자로 가정하고 또한 타인을 의심의 대상으로 보라는 국가의 일방적 독려이며 명령이다. 지금이 1960년대인가? 서울시내에 간첩이 우굴거린다는 말인가? 그리고 거동이 수상한 모든 사람은 간첩인지 의심해보라는 것인가?

10년 전에 한국의 공공장소에 걸려 있는 반공 표어를 분석한 적이 있다. ‘혼란속에 간첩오고 안정속에 발전온다’, ‘한순간의 좌경사상 후손에게 눈물된다’, ‘잘 보면 보입니다 지금 당신 곁에도 간첩은 숨어 있습니다’, ‘4천만의 신고정신 다져지는 국가안보’, ‘간첩신고 너나 없다 수상하면 내가 먼저’, ‘숨겨주면 같이불행 신고하면 같이행복’ 같은 표어가 전국에 수십만개 널려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간판은 낡았지만 내용은 변함 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반공 신고 표어는 사실 국가 안보와 관련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독재시대에 탄생해서 관성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하기 위한 장치로서 반북·반공주의의 산물이다. 민주화 20년이 다 된 이 시점에도 그것이 반성과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국가 안보’가 한국 사회의 성역이며 전제 없이 받아들여지는 가치라는 점을 방증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국가 안보와 별 관련이 없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겁을 주고’ 그들을 움츠리게 하며, 다시 한번 국가 안보 우선의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심어줄 뿐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나 비판이 아니며, 일반시민을 국가의 동원 부속품으로, 즉 ‘국민’으로 재생산하는 언술이며, “누구를 위한 국가 안보인가?”, “안보는 과연 무엇인가?”, “신고방송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미리 봉쇄하는 도구다. 그것은 이성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기본조건 형성과 발전을 가로막게 되며, 결국 진보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기능을 한다. 비판적 토론은 결국 용공과 반공, 건전과 불순, 안보와 불안이라는 이분법의 자장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공구호의 정치학은 ‘친북·좌익세력 척결’ 등 일상적으로 가동되는 ‘감시와 처벌’의 재료로서 다양한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은폐하며, 지배 엘리트의 이익을 보장하는 생활양식적 정치심리 체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 색깔론은 언제든지 ‘국가 위기’ 때 수면으로 급부상하여 ‘총수호 궐기대회’, ‘장외투쟁’ 등에서 보듯이 상당한 대중 동원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20년이 지난 이 시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완연하게 달라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할 때 과연 이런 방송이나 표어가 필요한가? 그것은 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가? 그러지 않아도 짜증나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왜 국가의 부름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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