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7 18:37
수정 : 2006.02.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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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모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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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스캔들은 흔히 내부 고발자가 있어서 폭로된다. 조직 안에서 저질러지는 비리가 내부자 고발이 아니고서는 외부로 알려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의 경우도 내부 고발자가 <문화방송> ‘피디수첩’에 제보하면서 시작되었다. 30대 초반의 ‘미스터 케이(K)’로 알려진 이 남자는 근무하던 병원에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
가족 문화와 군대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내부자 고발이란 생소한 개념이며 자칫 배신자와 동의어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내부 고발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국가 청렴도를 높일 목적으로 2001년 제정된 우리나라의 부패방지법은 내부 고발자에 대한 실질적·적극적 보호 활동을 규정하고 있다. 황우석 추문의 내부 고발자가 부패방지법 상의 ‘내부 공익 신고자’로 판명될 경우 그는 수억 원에 이르는 보상금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부패방지법이 내부자 고발을 은폐하기를 강요하는 행위 역시 부패행위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미스터 케이’가 사건 제보를 이유로 재직하던 국공립 병원에서 파면되었다면 그 결정에 관여했던 공직자들은 부패행위를 저지른 혐의가 짙다. 이런 현행법이 있음에도 참여정부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무능한 정부일 것이다.
황우석 추문에서 연구팀은 논문의 데이터를 조작하고 부풀리는 최악의 연구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미국 보건부 산하 공중보건처(PHS)의 규정을 보면, 연구 부정행위가 의심된다고 신고한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복은 그 자체로 연구 부정행위가 된다. 황우석 연구팀 또는 그 사주를 받은 자들이 ‘미스터 케이’의 파면에 관여했는지는 앞으로 나올 당국의 조사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다음달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연구진실성위원회(ORI) 업무를 담당할 인력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얼마 전 나붙었다. 우리나라 대학으로선 최초이지만, 국외 일류 대학 치고 이런 기구를 설치하지 않은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는 우리 학계와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와 관련해 연구자 윤리에 대한 우리 내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얘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 유네스코와 국제과학협의회(ICSU)가 공동주최한 부다페스트 세계과학회의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던 우리 정부는 그 후속 조처로서 과학자 행동강령을 제정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담당부처인 과학기술부는 늑장을 부리다가 2002년에야 ‘과학기술인 헌장’ 초안을 마련했다. 과학계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이 초안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월 한국과학기술자총연합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인 새해인사 모임에서 공식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날 ‘과학기술인 헌장’을 대표로 낭독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1년 후 연구윤리 위반으로 지탄받게 될 황우석씨였다.
그는 2003년도 대한분자세포생물학회(KSMCB) 윤리위원장을 역임한 바도 있었는데, 당시 운영위원이 전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이었던 박기영 순천대 교수였고, 윤리위원은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 정규원 한양대 법대 교수 등이었다. 이들 모두 황우석 추문의 주연 또는 조연을 맡았던 배우들 아니던가. 생명공학 선진국에서도 연구 부정행위가 이따금씩 일어나지만, 생명과학자의 ‘윤리’가 우리나라에서처럼 심하게 희롱당하는 사례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구영모/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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