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28 17:51
수정 : 2006.03.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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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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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얼마 전 삼성전자의 이동전화 기술을 카자흐스탄으로 빼내려던 이 업체 선임연구원과 그의 친구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크게 보도됐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긴밀히 협조해 기술 유출을 막아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산업스파이 적발은 이제 드물지 않은 일이 됐다. 이는, 한국의 기술이 외국에서 탐낼 수준이 됐다는 걸 의미하는 한편, 정치 사찰과 도청 등으로 악명 높던 국정원이 국가 핵심기술을 지키는 데 나서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산업스파이 사건이 크게 부각되는 일을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국정원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각시키려 사태를 과장하는지 모른다는 의심은 어차피 ‘의심’을 넘을 수 없으니 제쳐놓더라도 남는 문제가 있다. 기술 유출의 대부분은 연구 인력의 이직을 통해 이뤄진다고 한다. 그래서 기술 인력 통제 요구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과학기술인들이 ‘국가기술 보안법’이라고 비판하는 법안이 있다. 2004년 11월 여당의원들이 발의한 산업기술 유출방지법안이다. 이 법안은,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연구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소나 대학 등도 기술 보호 대상으로 하는 등 강력한 통제 조처를 담고 있다. 이를 두고 과학기술계에서는 과학기술 인력 전체를 잠재적인 산업스파이로 보는데다, 모호한 ‘첨단기술’을 내세워 전문 인력을 옥죄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지금은 일단 논란이 잦아든 상태지만,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사안이다.
이 논란에서 가장 두드러진 쟁점은 국가 경쟁력과 개인의 권리 사이 충돌이다. 그래서 이공계 인력 육성을 고려하면서 절충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이 논란엔 더 보편적인 쟁점이 밑에 깔려 있다. 임금 노동자의 정당한 몫은 어디까지냐는 게 그것이다. 기업이나 연구소가 임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지식과 창조적 산물 전체 또는 대부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건가? 이렇게 보면, 이 논란은 자본과 노동의 오랜 싸움과 맞닿아 있다. 자본은 노동자의 숙련기술과 지식을 자신의 소유물인 기계 속에 가능한 한 많이 축적하려 시도한다. 자동화 과정이 그 시도의 하나다. 그 결과, 미국 학자 해리 브레이버먼이 ‘노동자의 탈숙련화’라고 부른 과정이 나타난다. 나름의 기술을 지닌 숙련 노동자가 소모품 같은 단순조작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첨단기술 보호를 내세운 연구 인력 옥죄기도 이런 소모품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건 과거 숙련 노동자들의 싸움처럼 너무나 버겁다. ‘국가 경쟁력’ 이데올로기가 워낙 강력하게 작동하는 탓이다.
기술 인력 옥죄기는 정보기술을 이용한 노동의 국제 분업화 추세 속에 날로 심해질 것이다. ‘이머전스’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2000년 유럽 18개국 작업장 7268곳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절반이 하나 이상의 기능을 국내외 기업에 외주를 주고 있었다. 후속 작업으로 진행된 2003년의 아시아 실태 조사는, 외주 확대 추세가 몇 해 만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줬다. 이 분업화의 사슬에서 살아남는 길은 기술 지키기와 인력 통제 강화일 수밖에 없다.
통제 강화가 단지 기술 인력에 국한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기술 인력 문제는 노동자 전반의 탈숙련화, 소모품화 과정의 일부이자 전반적인 노동 감시 강화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기술 인력 문제를 ‘형편 좋은 전문직의 불만’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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