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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4 19:11 수정 : 2005.02.24 19:11

저 파시즘의 망령이 마침내 영화를 가위질해버렸다. 그리하여 ‘그때 그 사람들’은 ‘이때 이 사람들’로 현존하고 있다. 적어도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파시즘은 할리우드 괴기영화에서처럼 살아 있는 자들과 그 의식을 숙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음습한 발호와 복권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역시 과거사는 현재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말하기에 앞서 독재에 대한 범죄적 규정은 그래서 반드시 준엄한 처벌을 동반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장면을 삭제하라는 판결에 전율하는 것은, 박정희가 만들고 전두환에 이르러 재차 꽃이 만개한 국가원수 모독죄를 연상케 하는,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알권리를 봉쇄하고 창작과 상상력마저 차단코자 하는 기도가 너무도 맹랑한 까닭이다. 재판부가 실로 신속하게 내린 판단은 정작은 법의 이름을 빌린 검열일 따름이다. 혹 박정희가 권력의 앞마당인 궁정동 ‘안가’를 요정 삼아 한 일들이 이제라도 보호받을 만한 것들이었던가. 그에 복무하며 몸종 이하의 처신으로 행동했던 여인 감별 채홍사들이 중앙정보부, 곧 국가공무원이었다는 것은 타락한 권력이 이른 경지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를 즐기며 끝내 부끄럼마저 몰랐던 죄를 하물며 문명사회의 법원이 감추어주고자 한다니 허튼 법의 행태에 쓴웃음을 지우기 어렵다. 그와 술자리 또는 동침을 위해 200여명의 여인들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낯 둘 곳이 없다.

단지 개인이 아니라 그 더러운 역사를 되새겨 역사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뜻이 어찌 인격을 구기는 일이 되는지 법원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리어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범죄행위를 역사와 문화의 법정에서라도 기소해야 마땅하다는 게 인간사회의 양식과 상식에 부합하는 처사일 터이다. 그 재판부의 기준에 따른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는 박정희의 명예를 더 자주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문화산업이 상상력의 근거를 당대의 생동하는 역사에서 가져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중문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의 자유를 포함해서 박정희가 앗아간 대통령 직선제에서 노랑머리 또는 블로그까지 피눈물 없이 공짜로 얻은 자유와 기본권이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을 이 나라의 헌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소중히 새겨두어야 한다.

법이 인격훼손이란 이름으로 망령을 옹호한 일은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능멸이자 문화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므로 이번 판결은 영화를 보는 사람 모두에 대한 도전이자 관객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민심에 반하는 법의 판단을 무력화하고 온전한 영화를 보는 일은 전적으로 관객의 참여와 선택의 몫이 되었다. 우리는 가위질되지 않은 영화를 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쁨은 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죽은 이튿날 1979년 10월27일 아침, 스승은 교과서 맨 첫머리에 붙어 있는 국민교육헌장에서 박정희라는 이름을 도려내 버려도 더는 나무랄 이가 없으리란 말로 장구한 독재의 종말을 확인해주었다. 그렇다고 그 연필칼질로 망령까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를 청산하는 일을 정치적 과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해원과정 또한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과거를 가르치지 않는 집단에게 제대로 된 미래가 주어질 리 없을 터이다. 아울러 법조계에서도 그릇된 법 인식이 파시즘의 명예를 지키자는 망발로 이어지는 일만은 막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신뢰할 수 있는 법 해석과 민심을 헤아리는 집행으로 인간상식과 민주사회에 이바지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우리가 ‘그때 그 사람들’의 사회적 공유를 통해 문화적으로 징치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나 그 숙주들이 이번 판결에서 보듯 여전히 ‘이때 이 사람들’이기도 한 까닭이다.

서해성/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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