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5 18:42
수정 : 2005.02.25 18:42
정부와 여당이 비정규직법안의 강행 처리를 시도했으나, 노동계 및 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법안심의가 4월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법안처리를 한두 달 유보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이 참에 노동계는 물론 시민사회 전체가 폭넓게 참여하여 소위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 법안을 둘러싸고 표출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노·사·정간의 시각 차이가 심각하고, 정책추진자인 정부·여당의 문제의식이 근시안적이고 안이하기 때문이다. 우선 비정규직에 대한 정의부터 서로 달라서 그 수치가 제각각으로 나온다. 지난해 8월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노동계는 정규 상용직이 아닌 모든 노동자(56%)를, 정부(노동부)는 장기임시노동자를 제외한 한시적, 비전형, 시간제 노동자(37%)를 각각 비정규직으로 분류한다. 재계(전경련)의 수치는 정확히 어떤 기준인지 모르나 이보다 훨씬 낮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수준(노동계 50% 내외, 정부 65%)이나 사회보험 적용률에서도 차이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차이들도 의미심장하지만 더 핵심적인 사안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 혹은 대처방안이다. 여기서 노-사·정의 입장은 조정과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판이하고 대립적이다. 노동계는 비정규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한, 시급히 철폐해야 할 ‘절대악’이라고 보는 반면, 정부는 비정규직이 썩 바람직한 고용형태는 아닐지라도 세계화시대에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고 생각하고 그 남용과 부당한 차별(?)을 줄이겠다고 한다. 재계(전경련)는 세계화시대에 비정규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라고 주장하며 고용불안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확산을 환영하는 양상이다.
이렇듯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이 세계화에 대한 입장과 무관할 수는 없으나, 문제를 세계화냐 반세계화냐의 이념적 대결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진상을 왜곡하기 쉽다. 실사구시적으로 가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과도한 비율과 턱없이 낮은 임금수준, 심각한 노동권 제약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열악하다. 사용자 쪽에서 세계화의 요구를 빌미로 비정규직을 늘림으로써 손쉽게 이윤창출 구조를 꾸리지 않는지 엄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이번 비정규직법안의 문제는 정부가 이런 검토에 정성들인 흔적이 없다는 데 있다. 현재의 비정상적이고 불건전한 상태를 개혁하기는커녕 전향적으로 개선할 의지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비정규직’에 대한 처방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때 핵심적 물음은 비정규직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정말 혁신적인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 세대 전 여성노동자들을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노조운동을 짓밟았던 박정희 시대의 낡은 노동정책의 변용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터무니없다고 할지 모르나, 노동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 계층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성장을 꾀하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 것 아닌가. 그 핵심이 낡은 해법이라면 비정규직 문제도, 이와 긴밀히 연관된 사회 전반의 양극화 문제도 해결난망이다.
노동계도 자시쇄신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지만,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노동자 연대의 원칙도 저버린 채 근시안적 이권투쟁에 빠진 것이 근본원인 아닌가. 비정규직의 일상적 투쟁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강경하게 외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관건은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을 진정으로 혁신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건설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연대와 혁신이야말로 그 자체로 세계화의 끝없는 노동유연성 요구에 대한 참다운 대응이 아닐까.
한기욱/인제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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