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23 19:34
수정 : 2005.03.23 19:34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 속에 발전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는 욕심이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부 이루지 않으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그리고 좌절한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모두가 이상주의자, 원칙주의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혁명’을 갈구하게 되었다. 기존의 질서가 본질적으로 바뀌는 혁명,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믿게 된 것이다. 이상주의자에게는 전면적인 성취에 이르지 못한 성공은 결코 성공이 아니다.
역사는 이미 혁명의 시대를 저만큼 비켜섰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윤리와 정서는 아직도 우리들 몸에 진하게 배어있다. ‘새 역사 창조’ ‘역사 바로 세우기’ ‘과거청산’ 등등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자는 구호는 혁명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비장의 연속이었다. ‘전면파업’ ‘단식투쟁’ 이상을 이루는 방법도 지극히 극단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국민생활 속에 자리잡은 집단적 흥분 상태다. 가장 이성적인 논리로 설득해야 할 지식인들까지도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이상주의자, 원칙주의자가 꾸던 꿈 중에 아주 조금만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더 근본적인 의문이다. 우리는 이제 역사가 그렇게 조금씩, 차근차근, 그렇게 발전하는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닌가?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헌재의 위헌판결을 사실상 무력화했다는 비판 속에 여-야 간의 사전 절충이 이루어졌다. 정책 대신 정략이 담합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담합에 항의한 제 1야당의 정책위원장이 사퇴하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의원직까지 내 놓았다. 설움에 북받친 그는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즉시 눈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일급 탤런트 정치인이 아니기에 그의 눈물의 순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현장에 몸을 던진 또 한 사람의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목도하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을 금할 수 없다. 공동선대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출발한 그의 꿈과 이상은 냉정한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쳐 좌초한 것이다. ‘국민의 몫으로’ 돌려준다는 사퇴의 변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들린다. 이상주의자인 그는 좌절의 과정을 통해 조금이라도 이룬 것에 의미를 부여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일본문제와 관련하여 최근에 일고있는 반일 운동은 다시 한번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역사의 피해자에게는 일정한 정서적 특권이 있다. 짓밟힌 자의 아픔에서 유래한 특권이다. 국제사회의 동정에 호소하고 인류의 양심에 매달리는 작은 나라의 특권이다. ‘한스러운 피, 흙 속에서도 천년토록 푸르리라.’(恨血 千年土中碧) 당의 시인 이하(李賀)의 구절을 소설가 김원일은 최근의 작품 ‘푸른 혼’에 인용했다. 문학은 절대 분노, 절대 정의를 특장으로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엄정한 현실이다. 이제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잠시라도 외국에 나와 보면 뿌듯한 자부심마저 느낀다. 삼성이 소니를 추월했듯이 이제 한국과 일본은 거의 대등한 나라로 취급된다. 더 이상 우리는 제국주의에 짓밟힌 가난한 작은 나라의 역사적 특권을 국제사회에서 주장할 수 없다. 결코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과거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노대통령의 대일본 메시지를 ‘국내용 발언’으로 치부한 일본수상의 오만한 대응 또한 국내 정치용 발언일 것이다. 한국민의 분노도 이유 있다. 각종 항의시위에도 불구하고 아직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실로 다행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성숙했다는 증거가 된다. 격렬한 말의 향연이 결코 파괴적 행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격동기와 안정기는 다르다. 정치도 외교도 이제는 일상적인 정의를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성과 합리에 기초한 흔들리지 않는 정의의 체계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미국 샌타클래라 로스쿨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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