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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달력을 보니 봄인데 아직도 꽃샘바람이 매섭고 거칠게 불고 있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오래 전부터 목사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이 3월25일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책상에 앉았습니다.
돌이켜보니, 목사님께서 온몸으로 휴전선 철조망을 뚫고 평양으로 가신 지 벌써 16년이란 세월이 쌓였습니다. 그 때 저는 광주의 거리를 달리는 시내버스에서 뉴스로 목사님의 평양 방문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나운서는 흥분된 어조로 밀입북이라고 반복하여 보도를 했습니다. 휴전선의 철가시가 목사님의 온몸을 휘감고 있다는 느낌에 그만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누구는 세월을 흐른다고 하지만, 저는 세월은 쌓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세월이 쌓여 오늘이 있는 것이지요.
목사님께서 홀연히 평양을 방문했던 것처럼 또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 지도 11년의 세월이 쌓였습니다. 이 땅, 조국 한반도에 쌓인 11년의 세월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세월의 갈피를 들춰내기보다는 최근의 기분 좋은 소식 두 가지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지난 3월4일 금강산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 준비위원회’가 결성되는 것 보셨죠? 남쪽 준비위원회 상임대표로 목사님께서도 잘 아시는 백낙청 선생님, 북쪽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안경호 선생님, 해외쪽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문동환 선생님과 곽동의 선생님을 모시고 말 그대로 민족의 대단결을 이뤄내고자 하는 새로운 통일운동체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살아 생전에 그토록 꿈꾸었던 새로운 통일운동체가 비로소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기쁘시죠?
두 번째로는, 2월20일 금강산에서 ‘겨레말 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이 있었는데,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박용길 장로님과 편찬위원회 남측 상임위원장이신 고은 선생님이 손을 잡고 결성식을 치러냈으니 목사님도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1989년 3월25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통일국어대사전’을 제안하신 지 꼭 16년 만이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이고 우리 겨레가 숨결을 붙여온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겨레의 말을 채록하여 사전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 목사님께서 생전에 꿈꾸시던 두 가지의 일이 현실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목사님께서 생전에 친구처럼 여기시고 교분을 나누었던 백낙청 선생님은 ‘6·15 공준위’의 상임대표로서 남쪽 통일운동 전반을 지도하고 계시고, 고은 시인은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정력적으로 지도하고 계시니 저희들 마음도 가득 차오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크게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북과 미국의 대결구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한반도의 현실이 겨레의 숨결을 짓누르고 있어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문제는 미국입니다. 94년 제네바 핵협약을 결정적이고 엄중하게 위반한 것도 미국이며, 온갖 왜곡된 정보와 억측과 강경기조로 북을 자극하는 것도 미국입니다. 여기에 대해 북 역시 전술적 판단을 섬세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의 전술적 판단은 종종 미국 강경파들의 입지와 권력만을 강화해주는 오류로 귀착되곤 합니다. 대미관계에 남북관계 및 민간교류가 강력한 영향을 받는 것 역시도 오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미정세에 피동적으로 종속된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목사님. 그렇다고 주저앉아만 있을 우리 겨레가 아닙니다. 슬기롭게 고난을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는 민중적 꿈의 역사를 우리는 이미 목사님에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우리 겨레를 위해 그리고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정도상/소설가, 통일맞이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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