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3.25 18:31 수정 : 2005.03.25 18:31

한기욱/인제대 교수 영문학

2001년 3월 도쿄대학의 강상중 교수는 일본 의회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일본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전압을 높이지 않는 틀을 나라 안팎으로 만들어 갈”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그후 일본은 그의 바람과 정반대로 동북아 나라들의 ‘민족주의의 전압’을 확실히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렇잖아도 불안정한 동북아의 평화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일본이 그 사이에 동북아의 평화에 역행하는 행로로 나아가게 된 사연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국내외적인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90년대의 지독한 경기침체를 겪는 가운데 일본사회 전반이 우경화되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극우보수 세력이 집권층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는 국내 정치판의 변화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다 2001년 이후의 험악한 기류, 특히 9·11사태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과 북핵문제가 일본의 집권층이 전후의 평화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자위대의 재무장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주의화 자체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불길한 것은 그 와중에서 일본의 고이즈미 정부가 어느새 미국의 부시 정부와 찰떡궁합이 되어 또하나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과 대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일본과 미국 두 나라가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대국화에 따른 위협과 불안을 공유하면서, 이를 계기로 초강도의 미-일동맹을 구축한 것이다. 고약한 것은 고이즈미 정부가 갈수록 부시 정부의 일방적 군사패권주의를 닮아가면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행동하는 대목이다. 세계의 패권은 미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은 일본이 장악한다는 밀약이라도 맺은 듯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판세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갈림길 앞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한 길은 일본이 아시아의 ‘진성’회원이 되어 동아시아 나라들과 협력과 우애를 다지면서 함께 중화주의를 견제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마치 아시아 바깥의 나라인양 미국의 힘에 편승하여 중국과 대결하면서 동아시아 나라들을 깔아뭉개는 길이다. 전자의 길을 가려면 일본은 과거 식민주의 시절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고 그에 따른 배상을 할 필요가 있다. 이 길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래 탈아입구와 대동아공영과 같은 2급 패권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로서,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고 자국의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후자의 길은 일본에게 당장에는 신나는 길일 수 있다. 세계 제일의 패권국가인 미국 다음의 ‘넘버 투’이자 동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되는 듯한 환상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 정부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듯이 이 길은 평화와 번영의 길이 아니라 갈등과 전쟁의 길이다. 게다가 미국은 그 패권이 이미 기울기 시작하면서 우방을 하나씩 둘씩 잃어가고 있다. 일본더러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팽개치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동북아의 평화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분명히하는 가운데서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북-일수교를 통해 동북아의 일원이 되는 길을 타진한 점을 생각하면, 한반도 및 중국과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는 일본의 현 상황은 실로 안타깝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과 함께 패권주의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 분명하다면, 일본에게 우리의 단호한 입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다만 작금의 일본 패권주의가 단시일에 뿌리뽑힐 성질이 아님을 직시해야 하며, 일본이 ‘민족주의의 전압’을 높인다고 해서 우리도 덩달아 높이는 식의 대응은 사태를 악화시키기 십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기욱/인제대 교수 영문학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