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28 20:02
수정 : 2005.03.28 20:02
뒤늦게 시샘하는 폭설과 꽃샘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봄은 비와 함께 성큼성큼 오고 있다. 우리동네 소득작물로 온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해서 집집마다 옮겨심기를 끝낸 고추 모종은 씩씩하게 자라고 있고, 고추 지주목이며 농자재 구입 등 한해 본격적인 농사 준비로 마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농촌의 봄은 이미 이렇게 시작되었다.
작년에 귀농한 젊은 부부가 우리 마을에선 처음으로 소득작물로 봄 감자를 심었다. 2월 말에 언 땅을 갈고 심은 것이다. 감자는 보통 서리 때문에 3월 중순이 지나야 심는데 조금이나마 일찍 생산해서 높은 값에 팔고, 그 밭에 참깨를 이어 심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동네 형님이 거들어 비닐을 치고도 늦서리 피해가 염려되어 비닐터널을 덧씌웠다. 그러다 보니 생산원가가 너무 많이 든 게 아닌가 걱정이다. 2년째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판로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헐값에 공판장에 내다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품값은커녕 생산원가도 못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밥상에 올라온 반찬이나 과일을 보며 계절을 맛보곤 했었는데 요즘은 사철 언제나 채소나 과일을 만날 수 있다. 너도나도 일찍 출하해서 조금이나마 값을 더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비닐하우스는 기본이고 요즘처럼 기름 값이 비싼 때에도 난방까지 해야 한다. 그런다고 매년 좋은 값을 받는 건 아니다. 이른 철에 수확하는 농가가 점점 늘고, 수입 농산물까지 판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농사가 도박이 되어버렸다. 제 값은 고사하고 빚만 남게 되는 때가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온다. 그 때는 자식같이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갈아엎어야 한다. 몇몇 도시에서 장터를 열고 우리 농산물을 먹자고 열심히 선전도 해 대지만 그 효과는 크지 않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정부가 농산물 수확에 영향을 주는 여러 변수들을 미리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여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이나 풍년이 들 때에도 크게 가격이 오르내리지 못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농가의 수익도 안정되고, 도시 소비자들의 가정 경제도 안정될 텐데….
농촌에 내려와 살면서 제철음식의 참맛을 알고 나니 저절로 입이 고급이 되었다. 그래서 묵나물은 조금만 만들고 산나물 들나물을 비롯해 야채나 과일들은 제철에 실컷 먹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좋은 것은 농사짓는 농부가 먹고 도시 바보(?)들은 맛도 없는 것들을 비싼 값에 사 먹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남보다 먼저 또는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때가 되어야, 필요한 만큼의 과정을 거쳐야만 숙성된 맛과 완성도를 갖는 게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 고생한 만큼 내면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나 장이 익을수록 깊은 맛을 내는 것이나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봄이 되면 마음만 먼저 바빠지는 초보 농사꾼인 우리 부부는 올해 농사를 준비하며 농민들이 정성 들여 키운 농산물들이 모두 제 값 받고 팔리길, 그래서 올 가을 한해 농사를 정리하는 농민들 얼굴 가득히 웃음이 피어나길 빌어본다.
주영미/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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