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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8 20:04 수정 : 2005.03.28 20:04

<동아일보>(3월11일)는 ‘한일관계 춘래불사춘’이라는 제목으로 ‘욘사마 붐’에 그늘이 지고 독도(다케시마)문제, 교과서문제, 아사히신문사의 경비행기 독도 취재사건 등 문제의 분출을 우려하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3·1독립운동 기념일’의 노무현 대통령 축사에 대한 (일본)신문들의 과잉반응에는 놀랐다. 신문들은 “당혹”(아사히), “일-한관계를 저해하는 발언”, “지극히 유감”(요미우리), “위화감”(마이니치), “국내용” 등 매우 감정적이다.

불쾌감은 역사문제, ‘사죄’와 ‘배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서 온 것이리라. “도대체 몇번이나 사과해야 만족할 것인가”(산케이 3월3일 사설)라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이 납치문제에 언급하면서 “강제징용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제 36년간 수천, 수만배의 고통을 강요당한 한국국민의 분노를 이해하고 반성할 것을 요청한” 점이 신경을 거스른 모양이다. 게다가 일본여론의 북한비판을 견제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산케이), “북한의 바꿔치기 수법과 통하는 말투”(요미우리), “식민지지배라는 역사와 북한의 (일본인)납치는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대일 비난과 통한다”(아사히)라는 따위의 국가보안법을 방불케 하는 ‘이적론’ 일색이다.

그러나 연설의 취지는 한-일관계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화해와 협력을 향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반성과 사죄, 보상과 화해라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역사청산의 프로세스(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일찌기 ‘국가’의 외교로 ‘해결’한 것으로 치부해온 ‘위안부’나 강제연행 문제 등에 “한국정부는 책임을 느끼고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며, 일본도 법적인 측면을 넘어서 인류 보편적인 윤리와 이웃나라의 신뢰가 걸린 문제라는 인식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시민)참여정부’를 모토로 공권력 범죄에 대한 대담한 청산을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1월 한-일회담 때의 비공개 외교문서 전23권 중 3권분을 1차로 공개하고 8월15일까지 모두 공개할 것이라 한다. 일본은 이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지만 이미 비밀외교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는가. 군부독재정권이 일본정부와 이면거래로 청구권을 포기하고 “일-한합병조약은 합법적인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일본 공식견해를 부정할 수 없었던 한-일기본조약을 파기하려는 한국 국회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약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있고, 한국정부도 바로잡자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굴욕외교 반대”라는 강한 국민여론을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군 병력을 대학 캠퍼스에 주둔시켰다. 그 날 (나는) 고려대학 정문에서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가운데, 군대가 돌입해 들어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계엄령으로 비준을 강행한 조약에 합법성이 있느냐는 법적인 논의는 제쳐 놓고 이것으로 ‘해결 끝’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대북 ‘한-일협조’론 문제인데, 일본은 한-일의 전략적 접근의 차이점을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에서는 대북 ‘제재론’이나 ‘선제공격론’이 무성하지만, 한국에서는 김대중 정권 이래 ‘햇볕정책’, ‘평화·번영’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올해의 <국방백서>에서는 ‘북한 주적’ 개념을 삭제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남북한이 화해·번영의 길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본에서는 민족적 감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은 북한과의 수많은 유혈사태를 거쳐 무력행사는 공멸·전멸이라는 지극히 냉정한 판단을 토대로 한 국민적 컨센서스(공통인식)다. 아픔을 넘어 무력을 부정하고 대화와 화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2천년 ‘남북 공동성명’의 역사적인 의미를 일본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역학 속에서 오히려 일본이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한·일문제만이 아니다. 동아시아지역의 평화와 번영은 일본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언제까지고 미국에 기댈 수는 없을 터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나라들과의 ‘진실과 화해’가 필요하며, 그렇게 해야 한-일의 더 나아간 우호의 시대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서승/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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