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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간 아들을 그리며 |
3월 28일은 아이가 군대간지 20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세월이 빠르다고 이야기하면 여기선 빠르지 않다고 하여 웃기도 하지만 입대한지 20개월이면 상당한 시간이 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까 2003년 7월 28일 나는 어릴 적 아이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내를 싣고 논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평소에 나는 고속도로를 90km 이상 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모두의 분위기 때문에 80km로 달렸다. 갑자기 아내가 말한다. “평소보다 더 빨리 달릴게 뭐예요” 속도 판에는 80km 이었지만 마음은 120km 이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아이를 논산 훈련소에 놓고 돌아오는 날 그렇게 우리 식구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이었다.
아이가 백일 휴가 오던 날은 하루 종일 일손을 놓고 집에서 전화오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얼이 빠져버린 듯한 아이가 이등병이 되서 돌아왔다. 그림을 그리다 입대한 아이의 손은 거칠기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행군 중에 벗겨졌다는 발바닥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내는 아이의 손과 발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었다. 그러다가 훈련소에서 빠져버렸다는 엄지발톱을 보고는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와 나는 아내를 위로하면서 멋적은 웃음을 웃었다. 휴가 끝나는 날 아내와 나는 다시 아이를 태우고 부대를 향했다. 이등병 계급장이 퍽 외로워 보이는 아이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시간이 되어 부대 근처에 도착하였다.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주위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는 군부대가 있어 외롭진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 우리는 헤어져야했다. 주위가 캄캄해진 것을 보니 귀대 시간이 된 것 같다. 초겨울은 하루가 너무 짧았다. 아이는 아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위병소를 통하여 아이는 사라졌다. 어둠은 아이를 삼키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어둠을 통하여 안개라도 느끼고 싶었던 아내와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이를 두번째 만난 때는 어린이날이었다. 부대에서 그림을 그릴 것이 있으니 화구를 보내주었으면 하는 연락이 왔을 때이다. 아내는 직접가지고 가야한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날은 일병이 된 아이를 보았다. 훨씬 대견스러워지긴 했으나 106mm 포의 부사수라는 아이의 군 생활은 그리 넉넉해 보이질 않았다. 첫 번 때와 같이 캄캄한 부대 안으로 아이를 집어넣고 돌아올 때는 두 번째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은 정훈장교의 말이 우리를 감동시켰다. “어린이날이 아니었으면 내가 안내해서 전방구경을 시켜드렸어야 했다”는 정훈 장교는 우리를 너무나 신선하게 하였다.
아이가 입영하기 전날 나는 나의 입대기를 말해 주었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해서 대학을 졸업하는 첫 해에 군대를 가지 못했다. 훈련소에 입영은 하였지만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귀향조치 되었다.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님은 좋아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실망이 크셨다. 어떻게 되어 군대도 가지 못하는 몸이냐고 하신다. 나는 1년동안 병치료를 한 뒤 다시 입대하였다. 신병훈련을 끝내고 경기도 최전방 부대로 배치받아 가는 날 나는 아버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먼 곳까지 찐 닭 두 마리를 가지고 면회 오신 아버님을 뵙던 날, 나는 아버님의 참된 사랑을 느꼈다. 그것이 오늘 날 나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군대를 보낸 아이를 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나와 같은 경험을 제대하는 날까지 반복한다. 군 생활을 하는 모든 나의 아들들은, 너희들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대견한 젊은이들임에 틀림없음을 다짐하며 3월을 보낸다.
김창석/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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