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03 17:15
수정 : 2005.04.03 17:15
나와 이 세상을 근본부터 다시 성찰하는 삶을 살고자 산속에 들어가 밭을 일군 것이 6년 전의 일이다. 누군가가 산중턱을 불도저로 밀어내어 평평한 밭으로 만들어 놓은 곳에 어설프게나마 관행 농법을 흉내내어 로타리도 치고 비료도 주어가며 이것저것 심어보았다. 기계를 이용하여 땅을 곱게 갈아엎는 이 농법의 최대의 약점은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피복을 벗겨내고 속을 드러내었으니 아침나절에 잠시 촉촉했다가도 해와 바람으로 금세 물기가 말라버렸다. 할 수 없이 큰돈을 들여 드넓은 밭 상단에 관정을 파고 탱크를 설치한 뒤 굵은 플라스틱 파이프로 물배관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럭저럭 물을 댈 수 있어 가뭄은 면할 수 있었지만 병충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대로 다 죽일 수는 없지 않으냐면서 농약을 사다 뿌렸다. 수확철이 되어 농산물을 중간상인에게 넘겨주고 나니 생산비에 훨씬 못미치는 돈이 손에 쥐어졌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몸과 땅을 혹사시키며 일한 대가가 이것밖에 안 되는가 싶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영농자금을 대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 방법도 그가 선택한 것이다.
이런 농사를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떴다.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한 농장은 잡풀이 우거진 채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5년 남짓 만에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전적으로 농장의 주도권을 쥐고서. 다시 돌아온 농장은 완전히 칡밭으로 변해 있었다. 여길 봐도 칡 저길 봐도 칡이었다. 중간 중간 억새와 가시 산딸기가 떼를 이루고 있었다. 난감했다. 생태농업을 하고자 단단히 작정을 하고 왔기에 손에는 낫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을 뿐이다. 마차 앞에서 앞발을 들고 시위를 하는 사마귀의 기세로 칡밭에 뛰어들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첨엔 야생의 풍광에 잠시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짜증과 원망이 더해갔다. 그러나 몸이 고되다 하여 이들을 적대시할 수는 없었다. 주인 없는 척박한 땅을 이만큼이나마 비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쌓인 칡의 유기물질이 제법 두툼했다. 낙엽을 들추면 작은 벌레들이 옴실거리는 것이 보였고 축축한 흙의 온기가 느껴졌다.
문제는 땅에 묻힌 칡뿌리와 반쯤 묻힌 채로 온 밭에 종횡무진으로 뻗어있는 칡넌출이었다. 덩이뿌리를 거점으로 하여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칡넌출은 거의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주위에서는 무모한 짓일랑 그만하고 첫해만이라도 기계를 대어 갈아엎으라고 성화였다. 낫을 쥔 손에 경련이 일 때마다 그러고 싶은 충동이 불끈불끈 솟았다. 그러나 칡의 일당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독재적 방법을 쓰는 것은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지상부에 다양한 작물을 심을 수는 있겠지만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땅속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는 없다. 부지런히 몸을 놀려 칡의 영역을 줄여가며 칡으로 인해 무너진 생물종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칡넌출을 어느 정도 걷어낸 자리에는 두터운 칡의 유기물층에 구멍을 뚫고 갖가지 씨와 모종을 심었다. 이렇게 하면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늘 적당한 습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잡풀의 발생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므로 제초제를 쓸 일도 없다. 이제 틈만 나면 인근 산야를 돌아다니며 기르고 싶은 야생초를 캐어다 옮겨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야생초와 갖가지 작물이 어우러진 공생의 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께서는 귀한 칼럼난에 웬 신변잡기식의 농사일기인가고 가벼이 넘기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농업이 걸어온 길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글에서 ‘불도저에 의한 정지작업’을 ‘일제에 의한 강제적 근대화’로, ‘배관공사’를 ‘나라가 운영하는 중앙집중식 통치 인프라’로, ‘영농자금 대는 사람’을 ‘국제자본’으로, ‘칡밭’을 ‘인권과 생태환경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주력했던 친일 군사독재’로, ‘칡뿌리와 칡넌출’을 ‘기득권 세력’으로 대체하여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주시길 바란다.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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