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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6 18:36 수정 : 2005.04.06 18:36

진재학 논설위원

경기가 살아난다는 요즘 작은 기업체를 경영하는 한 선배로부터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부터 휴대전화 외장재를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해온 이 선배는 지난해 납품 단가를 45% 깎겠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았다. 우리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무엇인지 잘 안다. ‘갑’의 통고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무조건 수용하거나 납품을 포기하거나가 ‘을’의 선택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번에 납품값을 절반 가까이 깎는 일이 일반 상거래에서 가능한 일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기업의 납품값 ‘후려치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는 이 대기업은 올해 초 다시 15%를 더 깎아줄 것을 요구했다. 지금도 공장은 돌아가지만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 큰빚을 지고 나서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쳐 왔던 그는 다시 벼랑 위에 서 있다.

그는 “일본 도요타는 본사 직원 급여의 90%를 협력업체 직원에게 보장해주는 수준에서 납품가를 맞춰주고 있다”며 “이에 비해 우리 대기업은 오직 자신들만 살고자 한다”고 분개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중소 하청업체는 다 죽고 말 것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절실하다는 게 그의 호소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 사회적 강자의 ‘독식주의’가 더욱 심화됐다. 이른바 ‘양극화’다. 양극화는 여러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핵심 문제는 경제적 부가가치의 분배 왜곡이다.

양극화는 기술과 시장 독점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하청업체 및 중소업체의 납품가격 등을 부당하게 낮게 책정하고, 노동 생산성에 비해 터무니없는 임금을 주고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고용하는 데 있다. 지난해 천문학적인 순이익을 올린 전기전자·자동차·조선·은행 등 주요 대기업이 올린 수익의 그늘에는 하청업체 쥐어짜기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품삯 갈취가 자리잡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말에 상여금 ‘돈잔치’를 벌이는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잘리지 않기 위해 인간적 자존심마저 팽개쳐야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기업이 창출한 부가가치가 창출 과정에 기여한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 재생산을 위한 투자와 소비가 되고 국민 경제가 탄탄해지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외로 유출되거나 주주와 임원,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집중되는 ‘악순환’이 고착됐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시도가 양극화 해소의 출발점이다.

비정규직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전면화된 우리나라만의 기형적 고용형태다. 비정규직은 흔히 말하는 임시직이나 일용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동일한 작업장에서 동질의(아니 그보다 더 열악한) 노동을 하면서 오직 파견 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임금와 처우에서 엄청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은 다른 나라에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비정규직 고용이 자리잡는 데는 일부 대기업 노조가 고임금과 특혜를 좇아 ‘공범’ 노릇을 해준 탓이 크다. 기아차 노조의 채용비리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위세를 부리고 있다. 노동자의 계급적 대의를 배반한 이런 행태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과의 구분과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지 법적으로 제도화할 일이 아니다. 지금 정부·여당이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일부 고용 안정과 사회보험 적용 등 보호조항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파견 노동자 범위를 넓히는 등 비정규직을 완전히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때문에 ‘비정규직 법안’은 본말이 뒤바뀐 악법이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기로 어렵게 결단을 내린 민주노총이 이 법안에 대해 원점에서 재논의하자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부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궁극적인 철폐를 위해서.

진재학 논설위원 jhc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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