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2 19:10
수정 : 2005.04.12 19:10
이르면 다음주 이맘때쯤 우리는 새 교황의 선출을 알리는 뉴스를 접하고 있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에 모든 언론이 보인 관심은 솔직히 놀랍지 않았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거의 30년 전 바오로 6세가 타계했을 때에도 뉴스가치로서의 서거 소식은 이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종교인, 비종교인을 망라해서 일반대중이 보여준 뜨거운 애도는 놀랍고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번 경우만큼은 언론이 대중의 열기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많은 논평가들이 옳게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의 유형으로 묶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자유, 정의, 평화, 연대, 화해를 설파하고 실천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공산독재에 저항한 것만큼 강력하게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단죄했고, 물질주의적인 미국문명을 개탄했으며, 강대국의 전쟁놀음에 정면으로 반대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교리와 윤리문제에 있어 철벽같은 태도로 일관한 외곬의 종교 지도자였다. 바티칸의 중앙집중화가 가속화되었고, 교회일치 운동에는 진전이 없었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또한 동성애자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콘돔을 비롯한 피임금지 조처는 개도국의 에이즈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치, 경제적으로는 전향적이었지만 도덕, 사회적 이슈에 있어선 보수적인 지도자였다. 이런 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를 지향하면서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가질 법한 의문일 것이다.
이런 의문은 단순히 개인 호기심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확실히 드러났고, 5월 초에 있을 영국 총선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조짐이 보이는 사회적 보수주의의 동향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보수주의는 한 지붕 여러 가족의 양상을 보이며 그 기원도 여러 갈래가 있다. 그러나 어떻든 사회적 보수주의가 정치에서 영향력 확대를 지속적으로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한국의 진보진영이 종교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민주화 이후의 사회분화 양상으로 인해 이제는 영역마다 진보-보수의 순열조합이 복잡해지고 있으며, 종교와 세속적 진보의 잣대가 다를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만 하겠다. 예컨대 반독재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낙태에는 완강히 반대하는 견해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정체성 또는 자기 몸의 통제권과 같은 탈근대적 영역에서 치열한 가치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종교의 특성상 윤리도덕에 있어서까지 철두철미 개방적인 의견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민주화 투쟁기에 종교가 수행했던 사회적 순기능을 오늘날 세속윤리의 확대투쟁에까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하게 되었다.
둘째, 진보 진영에 가장 나쁜 선택은 사회적 보수주의를 정치·경제적 보수주의가 흡인하여 동맹을 형성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사회적 보수주의가 때로 역사의 바퀴를 역전시키려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정의감과 보편성에 대한 공통분모가 있으면 그 불씨를 살려 사회진보의 원군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설득해 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사회적 보수주의를 개인윤리의 차원으로 한정시켜 정치세력화를 차단해야 한다.
셋째,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론에 기반한 세속적 진보와 종교가 대단히 주관적인 윤리개념을 놓고 논박을 벌이는 것은 가능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인권은 존중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접근했을 때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종교인은 드물 것이다. 인권에 토대를 둔 자비와 사랑의 실천,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 단계에서 사회적 보수주의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진보의 가능한 수준이 아닐까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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