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3 19:20
수정 : 2005.04.13 19:20
2년여 전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당선이 확정되고 제일 먼저 찾은 언론사가 한겨레신문사였고 <한겨레>는 이를 ‘손님’ 난에 처리하는 대신 비교적 크게 기사화했다. 그 2년 뒤 한겨레 구성원 80여명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박봉이지만 긍지를 품고 다녔던 일터를 떠나야 했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한겨레에 대한 노 당선자의 선의의 표현은 국민과 독자에게 한겨레가 ‘친여지’나 ‘여당지’라는 인식을 남겨줄 수 있었다. 반면에 관공서나 관변단체들, 그리고 부대와 학교들에서 정권과 가깝거나 정권이 요구한 신문을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구독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대는 이미 아니다. 가령 충북 영동의 법원 지원은 창간 뒤 지금까지 한겨레를 단 한 부도 구독하지 않고 있는데, - 국민이 낸 세금, 곧 공금으로 신문을 구독하면서도 - 노 당선자의 한겨레 방문이 이런 헤게모니 작동에 영향을 줄 수 없고 또 주어서도 안 된다.
세상사란 본디 그런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입지만 그 결과로 얻은 민주화의 열매와 무관해야 한다. 민주주의 경계는 우리가 다가갈수록 저 멀리 물러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화가 자본주의를 규정짓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관철 형태가 민주화의 내용과 한계를 규정짓는다. 한겨레는 ‘민주화된 시대’와 ‘노동자의 분신’이 모순이라고 거듭 주장해야 하며, 이라크 파병 반대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야 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일하기 좋은 나라’를 요구해야 한다. ‘민주화된 시대‘에 한겨레의 소명이 사라질 수 없고, 더욱 치밀하고 섬세하게 요구되는 까닭이다.
인터넷 매체의 보급으로 종이신문이 위축되고 있는 게 세계적 현상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여론 형성에서 종이신문이 갖는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우리 유권자들은 최근 몇 해 이래 선거를 통해 부자신문들이 꾀하고 추구했던 권력기구(대통령과 국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국민의 의식이 부자신문들보다 개혁적인데, 신문시장에서 일상적으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부자신문들이다. 이 모순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자본의 힘이다.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소유에 대한 관심을 추동하는 신문이 주류가 되고, 자본주의적 심성과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존재를 풍요롭게 하기를 바라는 한겨레가 주류가 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또 오늘날 신문이 정치권력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반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실로 어려운 과제가 된 것처럼.
그래서 자본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는 부자신문들과 경제지들이 매일 600만부 이상 뿌려지는 데 반해, 사회 공익을 위해 자본주의적 지배 질서와 긴장하는 신문은 그 10%도 안 되는 실정이다.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의 선량들도 뽑아준 국민의 의지에 충실하기보다 이러한 신문시장에 의해 휘둘린다. 결국 노 대통령은 “신문이 변했다”고 말하게 된다. 스스로 산으로 다가가면서 산을 움직인다고 말했다는 마호메트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문구독과 관련하여 부자신문을 절독하겠다는 사람을 보기 어려웠던 반면에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사람을 자주 만났다. 한겨레의 독자층은 엷은데 무척 까다로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지는 본디 비판적 지지이며 비판적 지지여야 한다. 한겨레에 몸담고 있는 나 또한 한겨레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이다. 비판적이지 않은 지지는 맹신이거나 광신을 뜻할 뿐이다.
최근 한겨레가 새로운 대표이사, 편집위원장을 세우고 제2 창간에 버금가는 새출발을 모색하고 있다. 한겨레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본주의적 이기심과 긴장하도록 하는 성찰의 거처가 될 것이다. 한겨레에 대한 독자와 국민의 비판적 지지를 두 손 모아 빈다.
홍세화 기획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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