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4 19:19
수정 : 2005.04.14 19:19
모든 삶은 아름다우며 생명이 소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세상을 떠나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라면 그 삶과 생명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스물 네 살의 누님은 위암이 간에 전이된 상태로 발견되어 수술조차할 수 없었다. 다행히 아는 약사의 도움으로 진통제를 맞고 있었지만, 시골의 작은 방에서 극심한 통증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누님의 모습은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당시에 광주로 유학중이던 때라 시골집으로 내려간 어느 주말, 텅 빈 누님의 방을 보고 어머니께서 누님이 서울로 수술하러 가셨다는 말과 함께 흐르는 눈물에서 가족의 고통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의사가 된 뒤로도 내 누님과 같은 말기암 환자들의 고통을 만나고 있으며 매년 6만여명이 말기의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선한 환자들이 죽음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다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짧은 이야기에서 톨스토이는, 인간은 언제 세상을 떠날지 그리고 자신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모르며, 다른 사람의 배려로 산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실 말기환자와 가족들은 신체적으로 지치고 사회경제적 부담에 짓눌려 경황이 없다. 정작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며 자신들의 고통을 알리고 도움을 청할 여유조차 없다. 말기환자와 가족들은 정말 우리의 배려와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사들은 말기암환자 가족에게 집에서 편히 모시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 있는 환자는 아무도 없다. 말기암환자 대부분은 통증을 비롯한 10여가지의 증상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환자의 고통은 가족으로 이어져 말기암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매년 약 25만명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며, 매년 3만여명의 가족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저축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거나 교육을 미루는 가정도 있다.
그러나, 말기암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호스피스 의료마저도 약 5%만이 혜택을 받고 있다. 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진통제마저 보험급여의 제한을 받고 있다. 그들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으며, 사회복지 후원기관의 진료비 지원대상에서도 제외되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암 사망의 원인의 30%가 흡연이고 담뱃값에서 걷어진 건강증진기금이 말기암환자와 가족들에게 지원되어야 마땅하나 현재 지원 예산이 고작 전체 3억에 불과하다. 정신보건이나 노인보건 지원 금액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말기암환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국민들과 정부에 있다.
우리 사회의 원로, 종교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좀더 죽음의 슬픔과 의미를 안다면, 영안실만을 빛낼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기암환자의 고통과 그 가족의 부담을 덜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희망을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살기도 바쁜데, 곧 죽을 사람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냐고 할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을지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기억은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거칠게 하며 죽음을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서울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호스피스학술대회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이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밝혔듯이 말기암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구체화되기를 바란다. 말기암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들의 두려움을 극복해 주는 희망이며 배려가 될 것이다.
윤영호/ 국립암센터 삶의 질 향상 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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