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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14 19:31 수정 : 2005.04.14 19:31

지난주말 박세일 전 한나라당 의원과 전화 통화를 했다. 한나라당이 7월 조기 전당대회와 지도체제 문제를 놓고 겪는 진통을 생각하다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선 활기가 느껴졌다. 주로 경기도 안성의 도피안사에 머문다고 했다. 지난달 비례대표직에서 물러나며 밝힌 대로 <나라 선진화의 길> 집필에 들어가 “목차 정도를 가다듬었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의 ‘여의도 정치’ 생활은 1년 남짓 불과했는데도, 꽤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도 우리 정치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버림’의 의미를 두 차례나 상기시켰던 전력 탓일게다.

첫 번째는 지난해 4월, 그가 4·15 총선의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때 일이다. 그 무렵 그는 경기도와 충남의 부동산 투기의혹으로 적잖이 언론에 시달렸다.

그런데 뚜렷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했던 투기 의혹은 한 달쯤 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론이 났다. 그가 시세로 4억여원에 이르는 문제의 땅을 사회단체에 기부한 것이다. 이미 의혹이 잠잠해진 터라,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공직자로서 물의를 빚은 데 대해선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 번째는 널리 알려진 대로,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에 반발한 의원직 사퇴다. 비례대표는 흔히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앓던 병까지 낫는’ 자리로 일컫는다. 그만큼 탐나는 자리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의원직을 버렸다.

이런 행동들을 두고 아직도 추측이 구구하다. 한 쪽에선 이상주의자의 결벽증이라 하고, 다른 편에선 더 큰 판을 겨냥한 치밀한 계산의 산물이라고 한다. 행정도시 건설이 ‘수도 분할’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필자 역시 그의 선택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진실이었는지는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면 알게 될 터이다. 다만, 그가 여의도에서 사라졌는데도,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됐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정치는 참 묘하다. 금방 손에 잡힐 것 같은 목표도 바짝 다가서면 어느샌가 저만치 멀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기득권을 버리거나 내놓는 순간, 그 빈자리에 다른 가치가 채워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를 ‘버림의 향기’라 부를 수 있을까. 지난 16대 국회에서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을 만들고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세훈 전 의원이 남긴 향기 같은 것 말이다. 이런 향기는 삭막한 정치판에 따스함을 불어넣는다.

이 대목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보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박사모’라는 열성 지지층에다 제1 야당의 리더라는 위치 등 정치적 자산이 어느 누구보다 많은 그에게서, ‘내놓기’의 미덕을 느끼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퇴할 때 그랬다. 장학회 강탈 논란이 제기된 이후 이사장 사퇴 요구가 쏟아졌지만, 그는 “법적 하자가 없다”고 버텼다. 공교롭게도 이 문제가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상규명위의 조사 대상에 오를 즈음 박 대표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이를 두고 “물러난 게 아니라 밀려났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 대표가 좀더 일찍 결단을 내리고, 장학회 설립자의 유족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전혀 다른 ‘울림’이 생기지 않았을까?

요즘 터져나오는 조기 전당대회 소집 요구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그는 “재신임을 위한 조기 전대 소집을 결정한다면 사퇴할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배수진’의 결기가 느껴진다. 당내 비판세력들에 대한 서운함도 감지된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주장을 반복한다면 상황은 지리멸렬하게 흘러갈 뿐이다. 리더로서 당의 통합력을 높이기도 힘들어진다. 차라리 과감한 패를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는 식의 포용의 정치 말이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이런 얘기를 했다. “리더는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리더에게 가장 위험한 덫은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성공이다.”

봄이 완연하다. 이번주말엔 도피안사를 찾아 박세일 전 의원과 차 한잔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재권/ 정치부 정당팀장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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