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5 18:42
수정 : 2005.04.1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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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방송대 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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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산불 중에 골프 회동을 가진 이해찬 총리에 대한 비난이 그의 사과 한마디로 잠잠해졌다. 잘못했다는데 계속 야단치는 것도 바른 대응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싱겁게 지나가버리는 것도 우리 정치나 언론의 속성을 보는 것 같아 유괘하지만은 않다.
총리가 비난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한가하게 골프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라면 그 시간에 그가 관저에서 친지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었다 해도 똑같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국민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골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일 것이다. 만일 그런 이유에서라면 그 시간에 총리가 관저에서 한가하게 바둑을 두었다면 비난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총리의 골프 나들이를 비난하면서 한나라당에서는 재작년 태풍 때 대통령이 공연을 관람한 것도 싸잡아서 비난했다. 그때도 비난의 목소리가 꽤나 들끓었는데, 그렇다면 우리 정치나 언론은 골프나 공연관람을 한무리로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난이 총리의 사과 한마디로 쑥 들어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대통령의 공연관람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말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대통령의 사과가 없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반응이 다른 원인을 따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인은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악의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요 원인이 그들 자신도 상당수가 자주 골프를 치지만 문화공연은 어쩌다 한번 갈 뿐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산불이 났을 때 아마 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이 골프를 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총리에 대해서 어쩌다 잘못 걸렸다고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을 터이고, 사과가 나오자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다. 골프에 대한 국민적 거부정서는 부차적인 사항이었을 뿐이다.
우리 정치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때가 많지만 이번에도 그렇다. 골프와 공연관람에 대한 히스테리도,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도 모두 정상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보통사람보다 책임을 더 많이 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항상 현장에 가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 다른 일은 제쳐두고 좌불안석이 되어서 초조하게 기다려야 올바른 것도 아니다. 정치지도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담당자들에게 맡겨놓고 의연하게 다른 일을 해도 좋은 것이다. 공연장에 앉아있거나 골프장에 있다고 해서 연락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문제삼아야 할 것은 정치인의 소양이나 자질이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골프를 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지 연극이나 음악회에 가는 것이 좋은 일인지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일화를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1977년 10월 독일 비행기가 적군파에 동조하는 테러범에 의해 소말리아 모가디슈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전역이 이 일로 초비상 상태에 처했다. 테러범은 비행기를 공중폭파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그 시한이 몇시간 남지 않았다. 이때 당시의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집무실에서 귄터 그라스와 하인리히 뵐 등의 문화관련 인사들과 만나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약속은 오래전에 잡혀있었는데, 슈미트는 급박한 일이 생겼다고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다. 문화인들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납치와 관련된 긴급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그러나 총리는 그 자리를 일찍 파하지도 않았다. 몇시간 동안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고, 예정된 시간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바로 그러는 동안에 독일 특수부대원의 구출작전이 수행되었고,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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