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7 21:12
수정 : 2005.04.17 21:12
인권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 권리이다. 다른 모든 ‘권리(right)’들은 그 ‘올바름(right)’을 보증해주는 별도의 법적 근거를 갖지만 인권은 법에 규정되어 있을 때조차 그 법적 근거 때문에 보장받는 권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차라리 ‘하늘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인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사실’이 곧바로 ‘권리’이다. 그래서 ‘내게는 인권이 있다’는 말은 ‘나는 인간이다’란 선언과 같고, ‘내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은 ‘나를 인간으로 대접하라’는 요구와 같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인권’ 문제가 부각됨을 느낀다. 고문, 납치, 살인 등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야만의 과거사를 정리하는 문제도 있고, 지난 시절 자각하지 못했거나 제기할 수 없었던 각종 차별들이 새롭게 인식된 탓도 있다. 하지만 몇몇 사안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과거사 정리와 다르며, 아주 전통적인 주제라는 점에서 새로운 인권의식과도 거리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동과 관련된 경제적 권리들이다.
지난 1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직 관련 정부 법안에 수정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해당 법안이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는 데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비정규직이 고용의 일반 원칙으로 발전해가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와 재계는 크게 당혹해하는 것 같다. 고용문제를 인권위가 직접 다루는 걸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인권 투쟁으로 변모했다. 첫째, 이들의 요구는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생존 자체에 대한 요구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내 몫을 달라’라기보다는 ‘나를 살게 해달라’는 쪽에 가까워졌다. 이것은 법적 권리다툼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외침이 울려나오는 장소, 틀림없는 인권의 영역이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줄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원이 괴멸되었다. 시장경쟁력과 효율성이 모든 권리 요구들을 제압한 상황에서 인권은 사실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인권을 박탈하는 체제다. 경제적 인권에 대한 요구들 중 상당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지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를 부당한 억지 내지 경쟁력 저해 비용으로만 간주한다면,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인권이 자주 발동된다는 것은 법적, 논리적 시비 이전에 어떤 근본적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권위는 점잖게 “양극화된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지만, 실제로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심각한 회의가 싹트고 있는 게 아닐까.
정확히 1년 전에도 이 지면에 같은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우리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겠다.”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바꿔 부르며 인간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던 ‘420 공동투쟁단’. 나는 이들의 요구가 우리 사회의 기본 방향에 대한 중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으며 우리 모두의 권리와 해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해도 이들은 장애인들의 기초생활권, 이동권, 교육권, 문화권, 정보접근권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라!’ 나는 그것을 권리보다는 투쟁의 외침으로 듣는다. 천부인권. 하늘이 그 권리를 내리셨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하늘이 내리신 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의지와 능력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사회 너머에는 모든 법적 이데올로기적 시비를 넘어서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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