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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17 21:14 수정 : 2005.04.17 21:14

최근 검찰은 가정폭력범죄에 대하여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란 가정폭력범죄자에게 전문가 상담을 받을 것을 조건으로 하여 기소하지 않는 검찰의 처분을 말한다. 검찰의 이러한 방침은, 필자가 보기에는,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올바른 정책 속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검찰이 성급하게 자신의 권한확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정폭력은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범죄이며, 그 특성상 장기적으로 지속될 위험성이 매우 큰 범죄이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가정폭력을 그저 부부싸움이나 집안일 정도로 치부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있어 가정폭력의 예방과 근절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대책에서는 가정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명확하고 적절한 사건처리 기준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가정폭력이 국가적·사회적으로 대처해야 할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을 확립하는 방향이어야 하며, 가정폭력의 지속성과 위험성을 면밀히 판단하여 적절한 형사처벌을 강구함으로써 가정폭력의 재발방지 및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가정폭력범죄의 죄질이나 피해의 정도가 심각한 경우나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검찰은 적극적인 공소제기를 통하여 가정폭력을 ‘심각한 범죄’로 다루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검찰의 대응은 이러한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정폭력범죄의 기소율은 20% 이하로, 상해죄나 폭력행위처벌법위반죄의 일반사건의 경우 기소율이 50~60%에 이르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처럼 가정폭력범죄를 바라보는 검찰의 시각이 온정주의적이고 그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도는 검찰에서 가정폭력범죄를 가볍게 처리하는 관행을 더욱 굳히게 될 위험이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검찰의 사건처리에서 가해자의 재범의 위험성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정폭력은 당장의 폭력정도나 피해가 경미하더라도 재범의 위험성이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검찰의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등 온정적인 사건처리는 피해자를 추가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를 시범실시하는 동안에도 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며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다수 보고되기도 한다. 더구나 서울 동부지검의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의 처리지침을 보면 검찰이 과연 재범의 위험성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그 지침에는 ‘상습범 또는 재범의 우려가 있는 사건’이 포함되어 있는데, 상담조건부 기소유예가 재범의 위험성이 낮은 범죄자 중에서 선별되기는커녕,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범죄자에 대하여 오히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처분을 하도록 기준을 운용하고 있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설 지경이다.

이러한 검찰의 온정주의적 태도와 잘못된 관행은 가정폭력의 특수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피해자를 재차의 가정폭력의 위험에 방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의 재발의 위험성이 큰 범죄자에게 무책임하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 한가지, 검찰이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처분을 한 경우 상담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은 범죄자에 대한 사후모니터링이라든가, 사후조처가 대단히 미흡하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사후관리가 없는 상태에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는 애초 의도한 상담의 효과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정폭력은 경미한 범죄라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에 검찰이 일조하는 결과가 된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시급하다거나 반드시 필요한 대책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더욱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가정폭력이 심각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가정폭력의 위험성으로부터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와 객관적인 사건처리 기준을 갖추는 일이다.


이호중/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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